한국 현대추상회화 대표 작가 윤명로화백이 60년 화업을 총망라하는 전시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인다./사진=박현주기자 |
◆<윤명로:정신의 흔적전> 프롤로그
내가 태어났을때는 나라가 없었다. 성도 이름도 일본어로 바뀌었다. 내 이름을 되찾았을 때는 남북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나라는 두 동강이가 났다. 이념의 거대한 장벽을 넘어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을때는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때 나는 환경미화를 위한 성인들의 초상화를 모사해서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때의 기억들이 내가 지금도 여백앞에서 사유하고 고뇌하는 빌미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동족상쟁의 비극적인 잔해가 아직도 흰 눈으로 덮여있던 무렵, 주위의 반대를 뿌리치고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실존주의가 썰물처럼 대학가를 휩쓸고 지나갔다.
1959년 국전에서 특선을 수상한 <벽B>. 샤르트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세명의 사형수를 담은 작품. 사진=박현주기자 |
졸업을 앞두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국전에서 <벽B>로 특선을 했다. 샤르트르의 소설에 등장하는 사형수가 주인공이다. 절망과 부조리의 극한 상황을 휴머니즘이라 했다. 그때 국전은 화가 지망생들에게는 유일한 등용문이었다. 나는 등용문을 걷어차고 동료들과 함께 '60년 미술가협회를 창설했다. 그리고 주한 영국대사관으로 통하는 덕수궁 담에서 반국전 선언을 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신을 죽었다'고 외치며 거칠고 난삽했다. <원죄> ,<문신>, <석기시대>따위와 같은 작품들과 함께 <제 3회 파리 비엔날레>에 출품했던 <회화 M.10(1963)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무작위로 선을 그어대며 흔적을 남긴, 얼레짓.84-425. 1984. |
◆해병대 자원했지만 폐결핵때문에 ..추상과 만난 '자(Ruler)'ㅡ>'얼레짓'
1969년 록펠러재단의 초청으로 미국땅을 밟았을때 나는 닐 암스트롱이 인류 최초로 달에 남긴 발자국만큼이나 충격을 받았다. 자본주의가 실존주의를 해체하고 있었다. 뉴욕의 마천루와 지하철이 낯설지 않은 일상으로 돌아왔을때 조국은 나를 불렀다. 해외에 흩어져 있었던 병역미필자들을 잡아들여 평등사회를 이룩한다는 명분때문이었다. 나는 재학중 급우들과 함께 해병대를 지원했다. 그러나 폐결핵의 흔적 때문에 미취학자들과 함께 병종으로 분류되어 조국을 위한 의무로부터 분리된 몸이었다.
이 시기에 나는 '자(Ruler)'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했다. 자는 인간과 인간의 약속이고 규범이다. 그런데 세계는 '룰러=통치자들'에 의해서 규범이나 약속이 붕괴되고 있었다. 나는 짐짓 갈라지고 녹아 내린 자의 흔적들을 바라보며 자유를 갈망했다. 자의 형태는 사라지고 우연성과 부조리의 경계에서 균열만을 남겼다. 갈라지고 터진 흔적들은 의미없는 추상이 되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추상과 만났다. 이후 나는 화폭위에 무작위로 선을 그어대며 그 흔적들을 '얼레짓'이라 불렀다. 얼레를 감고 푸는 짓거리처럼 마음을 감고 푸는 몸짓의 흔적들고 비우고 채워나갔다.
도자기에 담은 겸재예찬 시리즈. 사진=박현주기자 |
◆<겸재예찬>연작은 세계화시대 정체성 잃고 있는 젊은 세대를 향한 화두
2002년, 정년으로 교육현장을 떠나자 갑자기 우리 것이 보였다. "여보게 우리 것을 세계화 하려면 지역성이 보편성을 띠어야 하네." 세계화의 중심인 뉴욕에서 고독한 삶을 마감하셨던 수화 김환기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 떠올랐다. 나는 미래의 기억들을 위해 늘 열린 상태로 자리 잡고 있는 표상들 가운데서 겸재의 <인왕재색도>와 능호관의 <설송도>, 추사의 <새한도>를 좋아한다. <겸재예찬>연작은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분별없이 정체성을 잃어가고 있는 젊은 세대들을 향한 화두였다.
나는 회사후소에 갇혀 수세기 동아 관념산수를 답습했던 화론들을 해체하고 싶었다. 안료나 수묵대신에 철분을 사용했다. 쇳가루는 안료가 아니라 입자여서 개칠할 수 없는 묘한 긴장감이 뒤따랐다. 철분은 습도에 쉽게 녹슬어 버리는 단점도 있었다. 쇳가루가 공기를 갉아 먹으며 서서히 철화백자처럼 환원이 되었다.
고원에서. 1029.2012. |
◆내 그림은 랜덤..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끝에 나타난 정신의 흔적
2010년 베이징에 있는 중국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나는 쇳가루와 함께 훈색을 사용했다. 철분의 불안정성과 긴장감때문에 고민하다가 훈색과 마주쳤다. 위치에 따라 색깔이 달라 보이는 훈색의 변화는 많은 관람객들의 다양한 시각을 견인했다. 만약 아크릴칼라가 없었더라면 팝아트나 옵아트의 탄생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한 픽셀의 진화가 없었으면 수묵이나 오방색도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되돌아보면 나는 화두를 바꿀때마다 새로운 미디어에 대한 탐색을 버리지 않았다.
내 그림은 랜덤이다. 랜덤이란 더 내면적인 공간으로 접근하려는 숨결이다. 마음대로 형성되는 무질서가 아니라 충분한 사고 끝에 나타나는 정신의 흔적들이다. 내 그림에는 아크릴릭이나 픽셀의 아름다움이란 없다. 그림이 아크릴릭이나 픽셀이 아닌 이유가 그림에 있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모방을 허락받지 못하고 태어난 고독한 존재들이다., 피카소는 일찍이 "훌륭한 예술가는 모방하고 위대한 예술가는 훔친다."고 했다.그러나 피카소는 분명 '예술은 모방이 끝날때 시작한다'고 말하고 싶었으리라.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에 걸린 겸재예찬 그림앞에선 윤명로 화백./사진=박현주기자 |
◆'윤명로:정신의 흔적'전.."정보화 사회 내 그림보고 위안얻길"
아주경제 박현주기자='윤명로:정신의 흔적'전이 2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막했다.
한국 추상회화 대가 윤명로화백(77)은 사르트르 소설 '벽'에서 영감을 받은 '벽 B'(1959)작품으로 국전에서 수상하면서 일찌감치 스타 화가로 데뷔했다.
화업 60년. "지난 60년간 ‘내가 무엇을 그렸나’하고 돌아봤더니 결국은 자연이었다"는 윤 화백은 기계문명시대에 원시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이 가득하다.
“요즘처럼 복잡한 정보화 사회에 관람객이 내 그림을 보면서 위안을 얻었으면 좋겠다”는 그는“인간의 오감을 안정시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결국 그림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1972년부터 서울대학교에 재직하면서 2002년 정년퇴임 할 때까지 30년간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학생도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아래 10년마다 작품을 변화시켰다.
물감층이 두텁게 칠해지고 낙서하듯 휘갈려 좀처럼 알수 없던 그림은 붓을 잡은지 50년이 되면서 날아가는 연기처럼 가벼워졌다.
이번 전시에는 195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10년을 주기로 큰 변화를 보였던 그의 시대별 대표작과 지난해 작업한 13m 대형 신작 등 모두 60여점을 선보인다. 작가의 역사적인 사진자료등을 보여주는 3편의 다큐멘터리영상도 상영되어 윤 화백의 작업세계를 입체적으로 감상할 수 있다.전시는 6월 23일까지.(02)2188-6000
◆윤명로 화백=△1936년 정읍생 △1970 뉴욕프래트 그래픽센터 판화전공 △1960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 졸업 △개인전 22회
▲수상=△2009 대한민국보관 문화훈장 △2006 대한민국문화예술상 △2002옥조근정훈상, 가와기다린메이 평론가상(일본)△1990제 7회 서울국제판화비엔날레 대상△ 1959 제8회 국전 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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