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이 1973년 4월 축구팀 창단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축구로라도 일본에게 큰소리 칠 수 있어 좋다.”
1973년 7월 5일 서울운동장(구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포항제철(현 포스코) 축구단(현 포항스틸러스)과 일본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친선경기에서 포항제철이 2대1로 승리한 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당시 사장, 2011년 작고)은 그 기쁨을 이렇게 전했다고 한다.
올해로 창단 40주년을 맞은 프로축구단 포항스틸러스가 발간한 ‘40년사’에는 박 명예회장의 축구에 대한 사랑과 함께 일본을 넘어서고 싶었던 의지가 담겨있다.
광복 후 좀처럼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에서 국민들의 유일한 기쁨은 축구를 보는 것이었다. 당시 국민들은 종목을 망라하고 한-일전에서 일본을 이기면 무조건 기분이 좋았는데, 특리 축구에서 일본에 승리를 거두면 더욱 열광했다. 박 명예회장도 마찬가지였다.
1967년 포스코 설립과 함께 7년여에 걸쳐 영일만 허허벌판에 종합제철소 건설을 진두지휘한 박 명예회장. 하지만 철에 관한 기술이 없던 당시 한국은 모든 기술을 일본에서 배워야만 했는데, 이 때 신일철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으며 기술을 습득해왔다.
마침내 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소에서 쇳물이 솟아나오기 시작했다. 박 명예회장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만세 삼창을 했다. 환희의 순간, 박 명예회장은 제철소 준공식 기념일에 맞춰 포항제철 축구단과 신일본제철 축구단과의 친선경기를 제안했다. 신일철로부터 당한 수모를 축구로 복수하고 싶었던 것이다. 앞서 4월 박 명예회장은 포스코 오기 전 사장으로 부임시 운영했던 대한중석 축구단의 스타플레이어들을 불러들여 축구단을 창단하며 이 날을 준비했다. 대한중석의 감독을 지낸 한홍기 전 감독을 초대 감독으로, 축구 국가대표팀 청룡팀에서 활약한 이회택, 최재모, 박수일, 최상철, 배기면, 이차만, 윤종범, 김창일 등을 영입했다.
창단초기 포항제철 축구단 |
1973년 7월 3일 포항제철 축구장에서 열린 역사적인 첫 경기에서 2대2 무승부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4000여명의 임직원을 포함해 3만여명의 포항 시민들이 운집했다. 당시 공식 인구 집계가 10만8854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포항시면 3분의 1이 경기를 보기 위해 모였다.
이틀 후인 5일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2차전에서 포항제철은 드디어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전반 7분 박수일의 헤딩슛이 상대 수비수 몸에 맞고 나오자 이회택이 추가골을 성공시켰다. 후반 43분 우에다에게 실점했지만 끝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았고 신일본제철을 2대1로 제압했다. 7일 대구에서 열린 3차전에서도 2대1로 승리하며 친선경기 3연전을 2승 1무로 마쳤다.
포항제철은 현재의 포항스틸러스로 역사가 이어지기까지 일본 팀을 상대로 총 32전 20승 8무 4패의 압도적인 성적으로 유독 일본에 강한 면모를 보이며 박 명예회장의 자존심을 지켜나가고 있다.
항상 기업의 경영 성과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던 박 명예회장은 그 방법 중 한 가지로 축구를 선택했다. 팀워크를 강조하는 구기 종목 중에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것이 축구고, 이는 스포츠 외교에 가장 적합한 종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경기를 앞둔 포항스틸러스 축구단 선수들을 격려하고 있다. |
박 명예회장은 최초의 축구 전용구장, 최초의 클럽하우스, 최초의 유소년 시스템 등을 도입하고 고 한국 축구의 선구자 역할을 자임했다. 또한 팀 자체에서 선수를 발굴, 육성하는 것이 생산적인 방법이며, 국가에 필요하고 유능한 인재로 키워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그를 기려 포항스틸러스는 전용구장인 포항스틸야드의 동쪽 지역을 ‘청암존’으로 부르기로 했으며, 지난 2월 신설한 ‘명예의 전당’에 박 명예회장을 비롯한 13명을 헌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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