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남편 혼자 나가 돈벌이를 하면 네·다섯 식구가 먹고 살았지만 지금은 부인들도 나가 시간제나 전업으로 일을 하는 가구가 점점 늘고 있다. 그만큼 먹고 사는 문제가 쉽지 않은 것이다.
미국은 한국만큼 타인의 부에 대해 신경쓰며 사는 분위기는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느끼는 삶의 어려움이 커지면서 부와 돈을 쫓아다닐 수밖에 없는 형편이 됐다. 그래서 현지인이나 이민자나 "미국 좋다는 말 다 옛날이다"란 말이 쉽게 나온다.
아무리 자기 자신과 가족의 벌이를 위해 일을 해도 넉넉한 경제 형편을 꾸려나가기가 어려운 이 때, 남을 위한 삶은 어떤 것인가 한 번쯤은 생각하게 해 주는 사건이 났다. 바로 미국의 대표적인 인권 변호사 중 한 명인 줄리어스 챔버스(76)의 타계다.
현지시간으로 2일 사망한 챔버스 변호사는 평생을 흑인 인권운동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다. 150여년 전에 있었던 남북 전쟁으로 흑인 노예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미국에서 흑인들의 인권은 100년 넘도록 제자리였다. 투표권은 물론 주어지지 않았고 모든 생활을 백인과 따로 해야 하는 지역들이 많았다.
학교나 공원, 식당 등 공공장소에서 흑백 분리가 명확했던 남부 지역인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나 성장한 챔버스는 이 지역 대표적인 도시인 샬롯에서 지난 1964년 처음으로 인권 변호 업무를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흑인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행동하는 지성인들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써야 했다.
그의 집에도 화염병이나 총탄이 날아들기 일쑤였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평생을 인권 운동을 몸소 실천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바쁜데 남을 위한 또는 역사의 발전을 위한 사건이나 운동에는 관심을 갖기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챔버스의 삶을 보면 흑인 인권 운동이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었음을 알게 해준다. 나를 넘는 ‘더 넓은 나’의 개념을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흑인이었던 챔버스는 흑인 인권이 개선돼야 흑인은 물론이고 법이나 정치권력으로부터 소외받는 계층의 삶이 나아짐을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흑인 인권운동의 대부격이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나 말콤 엑스도 미국 현대 인권운동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다. 한 사람은 크리스천으로서 한 사람은 이슬람 지도자로서 종교나 신념은 달랐지만 더 넒은 나의 개념이었던 흑인 인권운동을 평생 전개하다 결국 이를 시기한 범죄자의 손에 목숨을 잃은 인물들이다.
한국도 미국처럼 중산층 이하 서민들의 삶이 쉽지 않다. 한국에서 태평양을 건너오는 뉴스는 우울한 것이 많다. 사람이 개를 물어야 뉴스가 된다고 해서인지 특히 요즘 뉴스는 충격적이고 보다 보면 우울해지는 내용들이 많다. 그 대부분은 돈이나 사람 관계 등의 문제에서 오는 것들이다.
1인당 GNP가 아무리 커져도 사회 곳곳에서 이웃과 어려운 사람들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작아지면 사회는 풍요로워질 수 없음을 챔퍼스나 이들 인권운동가의 삶에서 알 수 있다. 이들이 없었다면 어떻게 미국이 세계의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나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되짚어 보게 된다.
삶이 아무리 각박하더라도 잠깐이나마 ‘나를 넘은 나’의 개념을 한 번쯤 생각해 보면 좋을 듯싶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서 사회를 따뜻하게 또 살만한 곳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