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은 1902년 12월 16일 천안 목천에서 태어났다. 미국 선교사의 주선으로 이화학당에 재학 중 3·1운동을 맞은 유관순은 조선총독부의 강제 명령에 의해 이화학당이 휴교되자 귀향하였다.
귀향한 유관순은 부친 유중권(柳重權)·숙부 유중무(柳重武)를 비롯해 조인원(趙仁元) 등과 함께 4월 1일 장날을 이용해 병천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그는 3월 31일 사전계획에 따라 매봉산 정상에서 다음날 만세시위가 전개될 것을 알리기 위해 횃불을 올리고,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4월 1일 아우내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자 병천주재소의 일제 헌병들이 출동하여 저지하였고, 이 과정에서 헌병의 발포로 순국자가 발생하였다. 그는 군중들과 함께 병천주재소에서 일제의 만행에 항의하고, 헌병들의 무력적 진압에 맞서 격렬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 시위로 인해 그의 부친인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해 10여 명의 순국자가 발생하고 4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20여 명이 체포를 당했다. 그는 3·1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1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유관순 열사 유적인 생가지는 봉화지(烽火址)와 함께 1972년 10월 14일 사적 제230호로 지정되었다. 1919년 4월 1일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일본관헌들이 가옥과 헛간을 불태워 유품 한 점 없이 전소되고 빈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1년 12월 30일 복원하였다. 생가 옆에는 유관순 열사가 다녔던 매봉교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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