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설국열차> 스틸컷. 사진 제공=모호필름·오퍼스픽쳐스 |
소위 잘나가는 영화를 두고 ‘별로’라고 말해야겠다. 봉준호 감독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커서 그럴 수도 있고 4000만 달러(약 430억원)에 달하는 제작비가 키운 기대감이 실망을 키운 지도 모르겠다. 국내 개봉 전 167개국에 선 판매됐다는 사실 역시 <설국열차>에 대한 기대감을 높일 뿐이지 만족감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가장 크게 실망을 안긴 부분은 이미 검증돼 많은 관객들이 열망하는 봉준호 감독의 미덕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다소 묵직한 주제의식을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풀어내 ‘먹기 쉽게’ 소화해 건네주는 센스, 그래서 터지는 웃음이 없다. 재미가 사라지니 주제의 무거움이 더욱 큰 질량으로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그렇다고 주제가 뭐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인류 역사에 계급이 생긴 이래로 반복돼 온 역사, 짓누름이 있으면 일어섬이 있는 혁명의 과정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계급의 허위적 본질과 차분해서 더 잔인한 권력의 속성에 주목한다. 보편적 주제여서 실망했다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봉준호 감독이라면, 인류의 역사와 현 계급사회의 단면을 신빙하기 세상을 달리는 열차로 응축하고 상징화했다면, 그것을 명쾌하게 해석해 낸 봉준호식 깨달음이 포진해 있기를 바랐다.
영화 말미의 ‘반전’을 그것이라고 말한다면 실망스럽다. 그 정도 권력의 속성은 TV에서 참으로 많이 방영한 영화 <오즈의 마법사>(1939)에서도 감지된다. 마법의 왕국 오즈는 세상과 인간에 관한 갖가지 속성과 편견이 상징적으로 대체된 판타지 공간이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설명을 아끼지만 특히나 두 번째 캡슐이 배달될 때 마법사 오즈가 떠오른다면, 영화는 급 시들해진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다 맛보는 초밥이나 북한의 사상학습이 떠오르는 세뇌교육 현장에 대한 친절하고도 세밀한 묘사가 반전에 기대 여유를 부리는, 느슨해도 너무 느슨한 전개로 다가와 가슴을 답답하게 할 수 있다.
<설국열차>는 한국영화다. 손님을 대접하는 예의 탓일까.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감성이 다른 크리스 에반스(주인공 커티스)와 틸다 스윈튼(메이슨 총리), 옥타비아 스펜서(소년의 엄마 타냐)와 제이비 벨(커티스의 동생 에드가)의 연기가 더욱 큰 공감을 자아낸다. 송강호(보안설계자 남궁민수)의 표정 연기는 최근의 부진을 지울 만큼 압권인데 대사 톤이 반음 떠 있다. 고아성(남궁민수의 딸 요나)의 톤은 더욱 높아 고막을 자극하는데 표정까지 과장되고 가볍다.
세계적 배우들을 캐스팅해 우리가 만들어 세계에 배급하는 영화 <설국열차>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다. 우리 감독과 배우의 ‘최상의 상태’를 만방에 보여 주길 바랐다. 감독이라는 직업이 잘해 온 것만 주구장창 고집할 필요는 없고 늘 변화, 발전해야 하는 숙명을 안고 있지만,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모르는 해외 관객들은 <설국열차>로도 열광할 수도 있지만, <마더>로 봉준호라는 감독의 예술성을 흡족히 경험한 국내 관객이 다시 한 번 화성과 한강에서 느꼈던 그 독특한 재미를 세계 관객들과 함께 설국열차 안에서 맛보고 싶었다면 욕심일까.
송강호와 고아성도 마찬가지다. <괴물>에서보다 못한 부녀 연기를 보여 준 두 배우, 우리 영화라는데 <설국열차>에 밀착하지 못하고 살짝 공중으로 떠올라 이질감을 준다면 체제 안에서 전복을 꿈꾸는 커티스와 달리 남궁민수와 요나는 기차를 떠나려는 사람이기 때문인 걸까. 감독과 배우의 합의된 의도라 해도 다른 캐릭터나 작품에 녹아들지 못한 두 사람만의 철옹성이 주는 부자연스러움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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