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만 아버지에게서 배운다_상> 박용만 회장“상의를 국내 최고 경제기관으로 만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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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8-1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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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병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앞줄 가운데)이 1967년 12월 12일 진해 상공회의소를 방문해 기념 촬영하고 있다.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취임을 앞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 그룹에서 4명째 상공업계 수장을 배출했다는 개인적인 영광에 앞서 경제계의 입장을 대변하는 수장으로서 어깨는 무거울 것이다.

특히 그가 취임을 앞둔 2013년 8월 대한민국 경제계에게 밀어닥친 상황은 아버지 고 박두병 명예회장이 상의 회장에 취임했던 1967년 8월 당시와 많은 유사점을 보이고 있다. 이에 박두병 회장이 상의 회장 시절 성취해 낸 업적을 되돌아봄으로써 박용만 회장이 이뤄내야 할 과제를 3회에 걸쳐 도출해 보기로 한다.<편집자 주>

“회장으로 들어와 보니 사무국의 인적 구조는 빈약하기 짝이 없고 기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해서 즉시 목표를 정했다. 첫째는 사무국을 개편 보강해야겠다. 둘째는 법정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가 정부나 외부에 너무나 알려져 있지 않으니 우리의 존재를 전 세계에 알리자.”

박두병 회장은 1973년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상의 회장 취임 당시의 심정을 이같이 밝혔다. 지금이야 대한상의 회장은 경제계의 비중있는 뉴스 메이커지만 1967년 8월 16일 제6대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에 선출된 당시만해도 박두병 회장은 언론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상의가 자체적으로 안고 있던 문제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감 때문이었다.

◆국민에게 외면받은 상의

상의는 민간 경제단체 중 상공회의소법에 따라 설립된 유일한 법정단체로 임의단체인 전경련과는 법적 지위가 달랐다. 대한상의는 대기업뿐 아니라 중소기업, 서울은 물론 지방 업체까지 망라한 대표성 있는 기구다.

상의는 하지만 초창기부터 경제력이 없는 중소상공인들간 계파 갈등으로 상대방의 이익 편취에만 몰두해 조직이 엉망으로 돌아가고 재정자립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권을 차지하고 있던 이들 때문에 대기업들의 가입도 저조했다. 이는 국민들이 상의를 외면하게 만든 원인이 됐고, 당시 언론사 기자는 “당시 상의는 일반인에게는 물론 기자들에게도 매력이 없었던 단체였다”고 회상했을 정도다.

박두병 회장이 대한상의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은 상의의 혼란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상의 내부의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대한상의 운영의 폐단을 이미 알고 있던 그는 ‘혁신’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갖고 회장직을 수락한 것이다.

◆외국기업 가입 문호 개방, 직원 처우 개선

박두병 회장은 취임 후 첫 인사를 통해 그의 뜻을 드러냈다. 사무국 인사를 통해 부장급 이상의 간부 5명 가운데 3명을 경질했는데, 그들 모두가 서울상대 출신으로 상의 이권을 갖고 흔들던 회원들의 측근들이었다. 이어 1969년, 1973년 상의법 재개정을 통해 상의는 상근부회장·전무이사·상무이사·이사제를 신설함으로써 집행기구를 강화했다. 또한 5인 이내였던 상근부회장을 8인 이내로 추가하고 명예회장 및 고문을 둘 수 있도록 했다.

상의법 개정 전 상의 회원은 크게 업종별 의원과 일반의원으로 나뉘었다. 업종별 의원은 16개 업종 가운데서 선출되며 일반의원은 상공업자 전체 중에서 선출됐다. 업종별 의원은 문제가 없었으나 일반의원은 중소업자가 판도를 장악하고 있어 대기업인들이 참여하고 싶어도 참여할 수 없었다.

박두병 회장은 상의법 재개정을 통해 회원을 상공업자와 특정 상공업자로 구분했다. 특정 상공업자는 상의측이 일방적으로 영업세를 많이 내는 대기업체를 추려서 그들에게 통지해 호선할 수 있도록 했다. 직접투자 또는 합작투자를 유치하고 있던 당시 한국의 외자도입 정책에 호응해 개정 전에는 회원이 될 수 없었던 외국인 상공업자도 가입토록 문호를 개방했다.

회원수를 늘리는 한편 회비도 올려 상의의 재정자립도를 높였는데, 박두병 회장은 들여온 수익을 대한상의 조직 강화에 투자했다. 조사부와 국제부의 기능을 대폭 확대·강화해 회원사 서비스 고도화를 추진하고, 우수 인력을 많이 채용하면서 급여도 올려 직원들의 처우개선에도 힘썼다. 상의회관을 남대문로에 건립한 것도 박두병 회장이었다.

◆“신문기사 코멘트 맘에 안들면 질책”

박두병 회장이 반발을 무릅쓰고 상의의 혁신을 추진한 이유는 단 한 가지, 대한상의를 국내 최고의 경제단체로 만들고 싶다는 의지 때문이었다.

1968년 4월 17일 부산에서 열린 전국 상의회장 및 사무국장 회의에서 박두병 회장은 “대한상의가 우리나라 유일한 법정 경제단체임을 확인하라”는 대정부 건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상의는 당시 한국의 상공인 35만명을 회원으로 갖고 있고 구한국시대부터 민족자본을 지켜 온 역사를 지니고 있는 법정단체임에도 회원이 겨우 125명에 불과한 경제인연합회(현 전국경제인연합회)에 눌려 지내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이날 대정부 건의 직후 박 회장은 경제인연합회와 한국무역협회 등으로부터도 비난을 받았지만 박 회장은 모든 것을 직접 받아내며 상의의 존재감을 키워나갔다.

상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한 그의 노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당시 정부에서 경제정책을 입안하면 언론매체들이 기사화하면서 경제단체의 코멘트를 실었는데, 박두병 회장은 이 코멘트들을 일일이 읽어 보고 대한상의의 코멘트가 상대적으로 부실하면 기사에 밑줄을 그어가며 당사자를 질책했다고 한다.

◆경제단체 존립의 필요성 재확인 시켜야

이러한 박두병 회장의 노력 덕분에 상의는 재정이 탄탄해지는 한편 국민들로부터 경제단체의 대표로서 신뢰를 얻게 됐다.

2013년 한국경제는 갑을 갈등, 경제민주화, 반기업 정서 등 갖가지 악재 속에 기업 활동의 자유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에서 대한상의를 비롯한 경제단체들은 경제계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기 안위에만 골몰하면서 위상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박용만 회장이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경제단체의 대표로서 상의의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내면서, 국민들에게 외면받는 경제단체들의 존재의 필요성을 재정립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당장의 반발과 견제에 물러서지 않고 혁신에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고 묵묵히 실천해낸 박두병 회장의 신념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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