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지도자는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지만, 그동안 살아온 삶과 최고 권력자가 되기까지의 과정은 확연히 다르고, 이것이 세 지도자의 각기 다른 리더십을 있게 했다.
세 지도자 중 제일 밑바닥부터 시작해 최고 권력자가 된 사람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다.
1953생인 시진핑 국가주석의 부친은 국무원 부총리, 전국인민대표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지낸 시중쉰이다. 중국 당·정·군·재계 고위층 인사들의 자녀를 일컫는 태자당에서도 상위 그룹에 속할 정도로 명문가에서 태어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지만 그 시절은 매우 짧았다.
지난 1962년 발생한 류즈단 사건은 9살 어린이였던 시진핑을 기나긴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이 사건은 마오쩌둥과 류샤오치 사이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마오쩌둥 편에 섰던 캉성이 혁명전사이자 시중쉰의 전우였던 류즈단을 주인공으로 한 장편소설을 반당 소설로 몰아 책을 출간하는 데 간여한 시중쉰을 숙청한 사건이다.
여기에 문화대혁명까지 겹치면서 시진핑은 1969년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부 산시성 옌찬현의 량자허촌으로 쫓겨나 배고픔과 강제노역에 시달리면서 7년을 보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반동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계속 거절당하면서도 끈질기게 입당원서를 내 1974년 열 번 만에 공산당 입당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인내와 함께 현장에서 인민을 이해하는 지도자로서의 소중한 자질을 갖게 됐고, 이것이 인화와 포용의 리더십을 형성하는 데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 후 부친의 복권으로 중앙정치에 진출할 수 있게 됐지만 그는 지방으로 가겠다고 자청해 1982년 허베이성 정딩현의 부서기로 내려갔고, 그 후 25년 동안 지방관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이 기간은 그가 최고 권력자까지 오르게 한 발판을 마련해준 기간이었다.
그가 2007년 3월 상하이시 서기로 발탁돼 차세대 지도자 경쟁에서 승기를 잡은 것도 25년 동안의 지방관 생활에서 보여준 적을 만들지 않는 정치적 능력과 한 지역에 부임하면 그 지역 원로 당원부터 찾아가 인사하는 인화와 겸손의 리더십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런 그의 리더십은 올 6월 7∼8일(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란초미라지에서 있었던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이 조만간 또 만나 '격식 없는 대화'를 한다는 데 의견 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개인적으로 친분을 쌓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시진핑 국가주석은 모두 발언과 기자회견에서 메모 없이 즉석에서 연설하는 등 회담을 주도적으로 편안하고 격식 없는 분위기로 이끌었다.
한국 박근혜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가 된 데에는 그의 아버지인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이 적지 않게 기여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칙과 진정성으로 상대방의 신뢰를 얻는 박 대통령의 리더십이 없었으면 어려웠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진핑만큼은 아니지만 그가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과정도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 20대 젊은 시절 부모님을 모두 총탄으로 잃어야 했고, 이후 18년 동안 인고의 나날을 보냈다.
1997년 11월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계에 입문하고 1998년 4월 대구 달성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승리해 국회에 입성한 다음 그해 한나라당 부총재가 되는 등 그의 정치인생 시작은 순탄했다.
하지만 △2004년 차떼기당의 오명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 패배와 돈봉투 사건 등으로 인한 민심 이반은 박근혜 대통령으로서도 정치인생에 큰 위기였다.
하지만 위기가 닥칠 때마다 박근혜 대통령은 △부정부패와의 완전한 단절 △경제민주화와 복지를 전면에 내세움 등으로 국민들에게 진정성으로 호소해 위기를 극복했다.
이런 박근혜 대통령의 리더십은 개성공단 문제 해결과정에서도 그 진가를 발휘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개성공단 중단 사태가 장기화되는 상황에서도 '개성공단 중단은 북한 책임이고 적당히 타협했다가 북한의 일방적 약속 파기로 개성공단 가동이 중단되는 악순환을 끊겠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정부는 개성공단 기업들에 대한 경협보험급 지급 결정으로 원칙을 벗어나 타협하느니 개성공단 입주기업들의 사업 중단도 불사할 것임을 분명히 하며 북한과 대화를 이어갔다.
마침내 남북은 14일 △남과 북은 개성공단 중단 사태가 재발되지 않도록 함 △남과 북은 개성공단을 왕래하는 남측 인원 신변안전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합의를 도출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박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에 비하면 집안 배경 덕을 제일 많이 본, 어찌 보면 '매우 쉽게' 최고 권력자가 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1993년 중의원 의원에 첫 당선된 후 극우 가문의 후광으로 승승장구하다 총리에서 사임하기도 했지만 지난해 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승해 다시 총리가 됐다.
하지만 자민당의 대승은 마이니치신문이 '어부지리'로 표현할 정도로 민주당의 실정에 의한 반사이익이라는 측면이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하지만 아베 신조 총리의 임기응변 리더십은 그가 정치적 악재를 타개하는 데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아소 다로 부총리 겸 재무상의 나치 망언으로 일본 국내외에서 비난이 폭주하자 아베 신조 총리는 조속히 발언을 철회할 것을 지시했고, 결국 아소 다로 부총리는 해당 발언을 철회했다.
아베 신조 총리는 15일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고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총재특별보좌관을 야스쿠니에 보내 '자민당 총재 아베 신조' 명의로 '다마구시'(물푸레나무 가지에 흰 종이를 단 것) 공물료를 사비로 봉납했다.
이는 주변국들과의 관계 악화와 국내 지지층 이탈을 동시에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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