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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역사가 마틴 데이비스의 해석이다. 그랜드 슬램이라는 용어는 카드게임에서 유래했고 테니스를 거쳐 골프에서도 통용된다. 테니스나 골프에서 그랜드 슬램은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는 일이다. 한 해에 열리는 메이저대회를 휩쓸면 ‘캘린더 그랜드 슬램’, 두 해에 걸쳐 메이저대회를 석권하면 ‘논-캘린더 그랜드 슬램’, 2년 이상에 걸쳐 메이저대회를 싹쓸이하면 ‘커리어 그랜드 슬램’이라고 한다.
테니스나 골프에서 메이저대회는 네 개였다. 그런데 몇 년전 시니어골프에서 메이저대회를 다섯 개로 늘린데 이어 여자골프에서도 올해부터 메이저대회가 다섯 개로 늘었다. ‘한 해 메이저대회는 네 개이고 네 대회를 석권하면 그랜드 슬램이다’는 관념이 박힌 골퍼들은 헛갈렸다. 그 가운데에 박인비가 있었다.
박인비가 올해 여자골프 메이저대회에서 3연승을 하자 그 다음 메이저대회인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할 경우 그랜드 슬램이 되느냐 안되느냐로 논란이 벌어졌다. 전자는 ‘4개 메이저대회에서 연속 우승했으니 그랜드 슬램이다’는 것이고 후자는 ‘메이저대회 5개를 다 우승해야 그랜드 슬램이다’는 것이었다.
박인비가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공동 42위를 하면서 이 논란은 잠잠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다음달 여자골프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인 에비앙챔피언십을 앞두고 일각에서 ‘박인비가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 캘린더 그랜드 슬램으로 인정받는다’고 함으로써 논란이 불거질 조짐이다. 그들은 “현대 남녀 골프에서 한 해 메이저대회 4승을 한 선수가 없고 그랜드 슬램의 이미지는 ‘4’로 굳어졌기 때문에 박인비가 우승하면 캘린더 그랜드 슬램이다”고 주장한다. 박인비 본인과 마이크 완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커미셔너, 로이터통신, 프로골퍼 캐리 웹과 폴라 크리머 등이 이런 주장을 하는 쪽이다.
그 반면 AP통신이나 미국골프협회, 여자골프 세계랭킹 2위 스테이시 루이스 등은 박인비의 캘린더 그랜드 슬램은 물건너갔다는 입장이다. 왕년의 ‘골프 여제’ 아니카 소렌스탐은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박인비가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하면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고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한다.
이 논란의 단초는 미국LPGA투어가 제공했다. 지난해까지 에비앙 마스터스로 치러오던 대회를 올해 명칭을 바꾸면서 메이저대회로 승격한 것이다. 여자골프의 활성화를 노리고 그랬거나, 타이틀 스폰서의 요청이 있었을 법하다. 어쨌든 한 해 메이저대회를 다섯 개로 늘려놓으면서 그랜드 슬램 충족요건에 대한 논란의 원인을 마련해줬다.
한 대회가 메이저대회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커미셔너의 선언이나 스폰서의 의중보다는 골퍼들의 인식이 더 중요하다. 박인비가 메이저대회로 승격한지 13년이 된 브리티시여자오픈에서 우승했더라도 그랜드 슬램이라는 표현을 망설이던 판이었는데, 갓 메이저대회로 편입된 에비앙챔피언십에서 우승해 메이저대회 4승을 올렸다고 하여 캘린더 그랜드 슬램이라고 불러줄 팬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박인비가 올해 메이저대회에서 3승을 한 것은 크나큰 성취다. 에비앙챔피언십까지 우승한다면 전인미답의 위업이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지 않는 캘린더 그랜드 슬램이라는 말을 한국에서 쓴다고 누가 인정해주겠는가. 2000년 US오픈부터 2001년 마스터스까지 남자골프 4개 메이저대회를 휩쓴 타이거 우즈의 ‘타이거 슬램’을 본따 ‘인비(Inbee) 슬램’으로 하는 것이 더 적확한 표현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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