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나는 오랫동안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내가 말해야 할 것을 또 그것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나는 내가 할말을 조각으로 번역하기 위해 노력했다."(루이스 부루주아)
9년전인 2004년 이명호도 그랬다.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에 재학 중이던 청년 이명호는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탐닉했다.
'예술'이나 '작가'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막연하게 캔버스를 놓고 그 안에 무언가를 집어넣으려고 고뇌하는 사람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 모습은 현재 진행형이다. 화가, 소위 예술하는 사람들은 모두 네모난 캔버스를 앞에 놓고 그안에 그려넣고 있다.)
직관은 통찰로 이어진다. 어느날이었다. 순간, 찰나에 늘 무심코 지나치며 바라보던 나무 한그루가 다가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야 나. 나 좀 봐"라고 나무가 말을 했다. 캔버스를 들고 나갔다.
이명호는 '보았다.' '나무뒤에 하얀 캔버스 하나 세웠을뿐인데…. 그리고 그것을 사진으로 찍었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졌다. "아, 바로 이거다" 확신이 섰다.
중앙대 예술대 잔디밭에 있던 나무 한 그루는 이명호를 '사진작가 이명호'(경일대 교수ㆍ38)로 키웠다.
2004년 대학원 석사작품으로 낸 '나무(Tree)'연작은 미술시장의 판도를 바꿨다. '그해 월간 사진예술 표지에 실렸고 프랑스 인터넷잡지에 올려진후 세계 미술시장에도 다가섰다. ‘2009 아모리쇼 10대 갤러리’인 뉴욕의 요시밀로 갤러리는 그를 전속작가로 선정했다. 앞다퉈 해외미술전에서 러브콜을 보냈고 국내외 미술계에서 “한장의 사진에 미술사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는 극찬을 받았다.
자연을 포장하는 행위로 현대미술의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된 크리스토가 구조물을 천으로 싸버린다면 이명호는 자연을 떠내, 들춰낸다. '캔버스에 그린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시공간, 감각의 지평을 넓혔다.
■ 나무 존재감 살리는 거대한 캔버스 퍼포먼스
화가들이 캔버스 앞에 앉아 붓으로 물감으로 자연이나 대상을 그려내는 대신, 그는 자연의 대상뒤에 캔버스를 하나 끼운다. 그런데 이작업 만만치 않다. 결과물은 그냥 사진이지만 거대한 설치작업, 사진프로젝트다. 수십명에서 수백명의 스탭이 함께 동분서주한다.
늘 보여지는 나무들은 가까이 다가서면 거대하다. 작게는 2m 이상. 그 뒤에 캔버스를 세우려면 두배이상 크기의 캔버스를 설치해야한다.
'나무, 현장에선 압박감이 상당하죠. 평균 5~6m가 넘다보니 풍력도 엄청 셉니다"
갤러리현대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 이명호는 "제 작품은 과정을 봐야 실감한다"며 반달눈을 한채 잦은 웃음을 보였다.
쉽게 보이는 작품은 '시간과 기억'의 싸움이다. 대상을 고르는데에만 6개월에서 1년까지 걸린다. 그의 눈에 '찍힌 나무'는 일사천리로 진행된다. 날씨 시간 환경변화에 민감한 자연에 인위적인 장치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제 작품은 일종의 살짝, 자연속에 담갔다가 꺼내는 것이죠. 시공간에 카메라를 넣었다 빼는 것이에요."
지난해 사막에 다녀왔다. 나무연작에 이은 '사막 시리즈'가 탄생했다.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 몽골 고비사막등에 엄청난 길이의 캔버스를 펼쳐놓은 광경을 보여준다. 하지만 사막시리즈 제목은 '바다'연작이다.
"사막의 기원은 바다래요. 나무연작이 다시보고 환기시키는 '재현'이라면, 사막, 바다연작은 '재연'이에요. 사막에가서 바다를 만들어낸 작품이죠."
사막작업은 뜨거움과 싸워야했다. 평균 57도. 필름이 녹아 색이 뒤틀렸다. 촬영후 나온 색, 보이는 사막과 다른 색이었지만 그대로 가자고 결정했다. 이러한 과정도 작품의 일부.
"일부 사람들은 포토샵을 했다고들 하지만 전혀 후보정을 하지 않았어요. 원래 틀로 맞출건가 고민도 했지만 찍힌대로 나온 작품입니다."
그는 사막에서 죽음을 봤다. 여체의 분홍빛 살결처럼 몽환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사막연작에 대해 "모든 것의 경계같더군요. 땅반 하늘반인 사막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이라며 이런 분위기가 나온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라고 했다.
이명호는 "사막에 가니 정말 편하고 좋았다"며"자신의 전생은 낙타"라고 했다.
■ "등대지기가 꿈이었는데"
눈을 감은채 자주 웃고 낙타같은 모습을 짓는 이 남자의 꿈은 지금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크고 거창한 꿈보다는 어두운 밤바다를 밝혀주는 등대지기가 되고 싶었다. 전국의 등대지기들에게 일일이 손 편지를 쓰며 조언을 구할 정도였다."외로움만 견딜수 있다면 너무 좋은 직업"이라는 답장이 쇄도했다. 등대지기가 되고 싶었지만 등대가 점차 기계화되는 추세 속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이 됐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에게 희망을 전한다는 의미에서는 내 작업과 등대의 역할은 같은 것 같다"고 했다.
이제 '예술을 밝혀주는 등대지기'가 된 그는 "자연을 드러내주는 작업, 평생 해도 모자라 대를 이어 작업이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연을 들춰내며 자연의 위대함을 다시 재현하는 작품은 그가 몸으로 느껴 나온 탓일까. 서정적이면서도 철학적으로 다가온다.
"지난해 러시아 울란바토르에서 억겁의 세월을 견디고 있는 바위앞에서 펑펑 울었어요.그 바위가 왜 이제 왔냐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앞으로 작업은 무궁무진하다. 사막연작에 이어 바위 연작도 나올 예정이다. 포스코등에 후원을 받기위해 뛰고 있다. 그는 지난 8월 '숭례문 프로젝트'가 아쉽게 불발됐지만 파리 개선문등 세계 각 나라의 상징물을 떠내는 작업도 계속 추진할 예정이다.
"저는 유기농작가에요. 일년에 겨우 4점이 나올정도로 작품이 많지 않아요."
그가 국내 상업갤러리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연다. 오는 12일부터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 본관에서 개인전 '사진-행위 프로젝트: 밝은방, 어두운 방…'을 열고 '나무' 연작과 사막 풍경을 담은 '바다' 연작을 선보인다.
'밝은 방'으로 꾸며진 전시장 1층에는 하얀 캔버스를 통해 나무를 주변 자연과 무관하게 그 자체로 온전히 드러내 보이는 '나무' 연작이 전시된다.
몽골 고비사막, 이집트 아라비아 사막,러시아 툰드라 초원 등지에 엄청난 길이의 캔버스를 펼쳐놓고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서 촬영한 '바다 연작'은 사막의 결속에 흐르는 시간을 잡아냈다. 있는듯 없는듯 보이는 흰 캔버스는 신기루같은 오아시스처럼 보인다. 하얀 캔버스와 영화작업을 하듯 수많은 스탭이 움직이는 작업과정을 담은 사진도 걸렸다. 미송과 단풍나무로 직접 제작한 액자도 눈길을 끈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02)2287-3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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