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천직으로 아는 ‘이성원 연기금고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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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12-18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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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 이성원


아주경제 윤소 기자 = “봉사란 무엇인가? 나눔을 평생 실천하며 사는것”이며 “소외계층을 돕고사는 것이 봉사가 아니겠습니까?” 이말은 이성원 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의 소견이다.

50년간 청소년 선도와 사회봉사에 헌신한 이성원(77·세종 조치원읍 거주) 연기새마을금고 이사장의 가족사가 새삼 주목받고 있다.
이상원 이사장은 세종지역 각 학교를 돌며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조하며 강의한다. “답게 살자” 이는 무슨 뜻인가? 이를테면 “학생답게 살자” “학생답게 열정적으로 공부하자” “학생답게 어른을 섬기자” “사람답게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살자” 등 많은 명언을 남기며 77세의 연령에 비해, 정열적인 강의가 이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6,25 당시 그의 부친은 한국전쟁 때 가족을 적지에 남겨두고 낙동강 전선에 뛰어들어 적군을 물리치는 국군에게 협력하면서 애국의 길로 나섰다.

그 무렵 여동생이 세상을 등졌다. 남동생은 월남전 참전 이후 후유증으로 요절하고, 하지만 이성원 이사장은 이런 쓰라린 가족사를 딛고 나눔을 솔선했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는 여전히 각급 학교를 돌며 청소년 선도에 열변을 토하며 배워야 잘 살수 있다고 특강을 한다.

이 이사장의 부친 이영복(1980년 작고)고인은 철도국 조치원역 선로반에 근무할 때 한국전쟁을 맞았다. 고인은 동료 50명을 규합해 철도결사대인 '조근반'을 편성, 북한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철로 복구에 나서는 무명의 용사였다. 대구역과 동촌비행장의 끊어진 철로를 잇고 낙동강 전선에도 투입돼 철로를 연결하는 등 목숨을 걸고 수송작전을 도왔다. “선친은 뒤늦게나마 2008년 참전유공자로 인정받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울먹여가며 옛날을 회상한다.

그의 부친이 낙동강 전선에서 철로 작업을 할 때 여동생은 열병으로 그만 세상을 등졌다. 또 남동생 향원(1977년 작고)씨는 월남 파병 중 고엽제 후유증으로 27세에 떠났다. 이 이사장은 "전쟁으로 두 동생을 잃고 난 후 국가와 사회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며 "막내 동생을 육군3사관학교에 보내 직업군인이 되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기원 계룡시장이 그의 막내 동생이다.

그가 고아를 보듬고 청소년 선도에 나선 것은 1964년 조치원역 역무원으로 근무할 때였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전답을 팔아 조치원 읍내에'희망원'이라는 고아원을 설립했다. 고아들에게 글과 기술을 가르치고 학교를 보냈다. 이렇게 보살핀 고아가 500여명이 넘는다.

전쟁고아들 대부분은 호적이 없었다. 입학은 물론 취업이나 결혼을 하기도 어려웠다. 이들을 자신의 집에 주소를 두고 호적을 만들어줬다. 이 이사장은 상경해 무호적자 구제를 호소하는 한편 정부에도 탄원을 제기했다. 결국 정부는 전국의 무호적자 8만 명에게 호적을 만들어 주기에 이르렀다. 정부와 인권단체는 그에게 사회교육유공자상, 인간상록수상, 청소년유공자표창, 청소년유공자상, 인권옹호대상(5개 인권단체 공동)을 수여한 인간 상록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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