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규하 기자 =# 지난해 말 직장인 A(38)씨는 인터넷을 통해 병행수입 제품인 디젤 시계를 구입했다가 곤경에 빠졌다. 백화점가 80만원대인 시계를 병행수입으로 반값에 구입했지만 사후서비스를 받을 길이 없어 막막했기 때문. A씨는 국내 AS를 맡고 있는 파슬코리아에 전화해 유상서비스를 문의했지만 정식지사 및 공식 판매처가 아닌 제품에 대해서는 유상수리도 어렵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현재 전체 수입품 시장의 6%에 불과한 병행수입 시장은 무서운 속도로 가속화될 조짐이다. 2조원 수준으로 추정되는 국내 병행수입 시장 규모에 더해 해외 직접구매도 점차 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해외 유명 제품이 국내로 들어오면 고가 정책과 맞물려 가격 널뛰기는 심화돼 왔다. 정부가 내놓을 병행수입 활성화 대책도 ‘수입부문 경쟁 제고 방안’으로 소비자편에 서서 질 좋은 제품의 합리적인 가격을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해외에서 싸게 파는 유명 브랜드 제품의 국내 거품을 빼고 직접 구매가 늘어나면 자연스럽게 소비 촉진의 붐이 일어 물가하락에 효과가 미친다는 논리다. 쉽게 말해 거품이 낀 물가를 시장논리에 맞게 낮추는 등 수입제품의 국내가격 안정화가 핵심이다.
기획재정부와 관세청 등 관련 부처가 이르면 3월 해외 유명 제품들에 대한 수입가격 거품을 없애기 위해 병행수입 활성화 추가 대책을 앞두고 있지만 사후 서비스(AS) 문제가 여전히 걸림돌이다.
◇ 병행수입 AS 차별, 공정위가 나서야
해외 유명 제품은 한국 시장에서 고가의 제품으로 통한다. 중국 일본 등 세계 15개국과 비교해도 화장품, 유명 유아용품, 의류 등은 우리나라가 가장 비싸 곳에 속한다. 가장 큰 원인으로는 독과점 판매에 따른 유통구조에 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1995년 병행수입의 길을 열어줬지만 국내 독점 판매권을 가지고 있는 업체들이 판매한 제품만 ‘정품’ 취급을 당했다. 병행수입품에 대해 AS 거부도 소비자 인식에서 부정적이었다.
한 회사가 만든 제품이 유통구조가 다르다는 이유로 ‘정품’ ‘비정품’의 딱지가 붙던 시기다. 여기에 ‘짝퉁’ 판매가 기승을 부리면서 병행수입으로 둔갑되는 일도 종종 일어나 병행수입 활성화에 찬물을 붓던 때였다.
병행수입업계는 병행수입 활성화를 위해서는 QR코드 등을 통한 ‘짝퉁’ 식별 장치를 확대하고 병행수입판매의 시장 진입을 막거나 소비자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업체 처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무엇보다도 교환·환불·AS 차별이 문제다. 지난 정부 때 공정위는 병행수입을 부당하게 저해하는 독점 수입업체에 대해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위반행위가 적발되면 엄중 제재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그러나 이번 정부 들어 기획재정부·산업통상자원부·관세청 등 유관부서 합동 병행수입 논의 과정에 공정위는 제외된 모습이다.
병행수입 활성화 안에는 독과점 폐단과 AS 개선 등 병행수입 민주화도 녹아있어야 하지만 가격 다운에만 신경 쓴 채 정작 가려온 곳을 모르는 탁상 행정이라는 비난을 자초할 기세다.
공정위도 병행수입 AS 문제에 대해서는 눈치로 일관하는 모습이다. 수입·유통구조 시장을 방해하거나 병행수입 등 수입채널의 진입을 금지, 담합하는 독점적 유통 업체에 대한 엄벌은 현 공정거래법 적용이 가능하지만 병행수입 AS 개선 작업에는 다소 소극적인 자세다.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의거, 애플 AS 정책에 매스를 가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상반된 모습이다.
정식수입업체들도 물러설 기미가 없어 보인다. 병행 수입 상품에는 대부분 정품인증서가 들어있지만 정식수입매장들은 플라스틱 인증서나 설명서 안에 인증서가 있어도 병행수입 자체는 유상 AS도 거부하고 있다.
정품인증서에 정식 판매한 업체 등 관련 정보가 기재돼 있어야만 사후 관리가 가능하다는 기준을 들먹이고 있다.
경제 관련 전문가는 “인터넷 쇼핑몰 등은 화색을 비추고 있지만 독점 판매권을 보유한 수입업체나 백화점은 울쌍”이라며 “매출 하락이 우려돼 AS 매정함은 더욱 기세를 높일 수 있다. 정부는 병행수입에 대한 소비자와 기업 간 균형추를 들여다보는 실효적인 해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관세청 관계자는 “관계부처들 간 협의로 병행수입 상품 AS 활성화 방안도 검토하고 있지만 고민스러운 건 사실”이라며 “강한 규제보다는 업계와 합의점을 찾아가는 등 균형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공정위 고위 관계자는 “이번 병행수입 활성화 대책 논의에서 공정위는 포함되지 않았다”며 “유관 기관들이 해법을 모색하고 있는 상황에서 병행수입 AS와 관련해 공정위가 입장을 표명할 부분은 현재로써는 딱히 없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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