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이중섭과 함께 술을 마시던 한묵은 대뜸 "나는 메릴린 먼로가 좋다"고 했다. 이중섭이 종이에 그림을 그려넣고 제목을 고민하던 중이었다. 한묵의 말을 들은 이중섭은 이 그림에 당시 메릴린 먼로가 출연했던 영화의 제목을 따 '돌아오지 않는 강'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머리에 짐을 인 한 여인, 집 안에서 창문에 턱을 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한 한 남자. 생전에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종이에 그림을 그리고, 그나마도 구하기 어려울 때는 담뱃갑 은박지에 그림을 그려야 했던 이중섭의 '종이 그림'이 다시한번 감동을 선사한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는 2월 5일부터 여는 '종이에 실린 현대작가의 예술혼' 전은 이중섭을 비롯한 근현대 대표작가 30명의 종이 작업을 집중 조명한다.
갤러리현대는 "종이 작품이야말로 작가의 의식과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근간"이라는 인식에서 이 전시를 기획했다. 작품 120여점을 본관과 신관에 나뉘어 선보인다.
전시 기획에 참여한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28일 기자들과 만나 "종이에 연필, 종이에 붓으로 그린 작품은 작가의 가슴 속에 담긴 예술혼을 쏟아내는 기본 재료이자 창작의 일차적인 결과물인 작품이 많다"고 설명했다.
아내에게 보내는 엽서에 그림을 그린 이중섭이나 그림 값 대신 물감을 사서 보내달라고 했던 박수근에게 종이는 생활고 속에서 유일하게 작품 생활을 가능하게 해준 매체였다.
유홍준 교수는 "박수근의 <나무와 두 여인>, <모자(젖먹이는 아내)>는 똑같은 구도의 유화가 있지만 형상의 드러남이 훨씬 또렷하고 정확하다" 며 "종이에 그린 연필 스케치는 계속 수정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작용한 것 같다. 또 초롱꽃을 그린 것 같은 <꽃>을 보면 단순하면서도 순정이 넘쳐흐르는 그의 연필화가 갖는 매력을 여실히 볼 수 있다"고 소개했다.
종이는 작가들이 본격적인 작업을 하기에 앞서 수많은 고뇌와 실험을 부담없이 쏟아놓을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설악산 화가'로 알려진 김종학은 이 닦는 모습의 자화상이나 여체 누드 등 인체에 대한 실험을 종이에 수채로 담아냈다. 김환기는 마치 일기를 쓰듯 매일 종이에연습했다. 또 조각가인 김종영과 권진규, 최종태가 종이에 그린 크로키는 조각 작품 못지않은 무게감과 형태감을 준다.
전시에는 한묵과 권영우, 전광영 등 종이 자체가 갖는 물성에 주목한 작가의 작품, 종이에 수묵담채로 개구리와 금붕어같은 그림을 그린 천경자의 스케치 등도 선보인다.
유 교수는 "산문을 쓰게 하면 그 시인의 실력이 나오듯 캔버스에 그린 작품에서느끼지 못했던 종이그림은 그 작가의 내공과 실력이 종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듯하다"고 말했다. 전시는 3월 9일까지. (02)228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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