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철강 1세대중 한명인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현역을 누비며 한국 철강산업, 더 나아가 한국 경제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철강업계를 중심으로 그에 대한 아쉬움과 추모의 열기는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한일철강 임직원들을 비롯한 철강업계 인사들은 생전에는 어르신으로 조용히 계셨던 분이기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후에 한국철강업과 평생을 함께 해온 한국철강업계의 산증인이기에 어르신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진다고 입을 모은다.
엄 회장은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지난 2004년 4월 평안북도에서 열차 폭발 사고가 일어났던 그 곳이다. 당시 엄 회장은 고향의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자 용천군민회를 통해 구호물자를 보내기도 했다. 고향을 떠난 지 60여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는 평안도 사람이요, 고향을 갈 수 없는 실향민이었다.
엄 회장은 평소에 ‘맹호출림(猛虎出林)’ 이라는 말을 좋아했다고 한다. 이는 평안도 사람 기질을 말할 때 쓰던 말로 조선왕조를 세운 개국공신 정도전이 지은 ‘팔도인심평’에 나오는 말로, 평안도 사람들은 맹호처럼 적극적이고, 책임감이 강하고, 확실한 평안도 사람의 기질을 좋아했다고 한다.
평안도의 강한 기리를 이어받은 덕분에 엄 회장은 한 평생 강직하고 대쪽같이 정직하게 사업을 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엄 회장은 평소 “비록 손해를 보더라도 절대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이익이 많더라도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으며, 남들이 싫어하는 것이라도 옳은 일이라면 서슴없이 했다. 그러다 보니 많은 기회를 포기해야 했고, 회사도 재벌급 규모로 회사를 키우지는 못했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1945년 철강업과 첫 인연
엄 회장이 철강업과 연관을 맺은 것은 1945년 결혼을 하면서부터다. 장인은 만주 봉천(심양)에서 강덕금속공업주식회사라는 회사를 운영했는데, 선반 70여대를 보유하고, 고철을 회수하여 제품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
장인은 당시 만주의 큰 재산가로 공장과 교육사업도 했는데, 당시 봉천에 남만공업학교를 설립했다. 엄 회장이 장인과 함께 경영에 참여하면서 철강과 첫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된다. 하지만 일제가 패망 후 공산정권이 들어서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자, 가족과 함께 월남을 하게 된다. 만주에 있을 때는 재산가 장인을 뒀으나, 공산정권에 모두 빼앗기고 쫓겨나게 되자 엄회장은 가족과 함께 월남했다.
엄 회장이 월남시 가진 돈은 4000원이 전부였다. 그는 이 돈으로 을지로에 가게를 얻어 장사를 시작했다. 해방 후 서울은 북쪽의 송전 중단으로 전력이 부족하게 됐고, 이에 전기대용으로 쓰이던 카바이드 장사를 시작해 큰돈을 벌게 된다. 그러나 곧 6.25 전쟁이 일어났고, 엄 회장은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게 된다.
2년 뒤 서울로 돌아온 엄 회장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주택과 건물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건축자재가 필요할 것으로 판단하고, 협성상회라는 가게를 열어 함석(아연도장 철판제품)을 판매하는 사업을 하게 된다. 이후 사업은 주택 복구와 맞물려 크게 번창하게 되고, 신화실업이라는 함석공장에 투자를 하게 되면서 경영자로서 기반을 다지게 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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