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젊었을땐 재현에만 힘을 썼죠. 하지만 이제 저는 닮게 그리는 일은 관심이 없어요."
8년만에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국내 극사실화 최고봉인 고영훈(62)화백이 여유로워졌다.
남들이 2~3년만에 하는 전시와 달리 2006년이후 전시장에서 자취를 감췄던 그는 8년의 공백이 무색하게 느긋했다.
그는 "전시를 위한 전시가 아닌, 발표를 위한 전시가 돼야 하지 않나 싶었다"고 했다.
2002년이후 심취한 도자기와 자화상을 내건 그림은 '환영의 환영'을 보여준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사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그의 말처럼 그는 이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초월하고 있다.
'회화의 극한'을 넘어섰다는 평가는 받는 그는 "극사실주의라는 게 과연 맞는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며 "정말 잘 그린 게 무엇인지, 또렷하고 흐린 것 가운데 어떤 게 '리얼'인지 재고해 봐야 한다"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돌과 군화, 콜라병, 코트, 달 항아리와 같은 사물을 40년간 치밀하게 묘사해왔다.
변한건 세월탓도 있다. 뿌옇게 그린것은 나이가 준 '선물'이다. 침침해지는 눈 때문에 형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 작업실에 8개나 있는 안경을 돌려쓰며 그리지만 흐릿하게 보이는 건 사실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상을 흐릿하게 그린것 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동안 '환영'(幻影)을 수단 삼아 실재하는 현실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환영 자체를 현실이자 실재로 받아들인거지요."
그의 작품은 실재와 환영이 뒤섞여있다. 사진으로 나온듯 리얼하고 치밀해 감상자를 여전히 혼란에 빠트리지만 이번 작품은 그림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선명한 모습부터 뿌옇게 흐려져가는 장면이 차례로 전시됐다.
도자기 시리즈와 책과 꽃 시리즈, 자화상과 둘째 아들 초상화 등 신작 40여 점을 선보이는 전시 제목은 '있음에의 경의'다.
"있는 것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희망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는 이번 전시는 소멸과 생성을 이야기한다.
흐려져가는 분청사기와 자신의 둘째아들 초상화와 자화상을 나란히 내걸어 과거와 현재, 뒤척이는 미래를 보여준다.
"사진을 찍어 그리지 않아요. 도자기 그림은 실제 도자기를 놓고 그리죠. 날마다 보고 또 보고 보는 도자기지만 볼때마다 느낌이 달라져요. 수백년이 된 도자기를 마주하면 그 시대와 내가 보는 지금, 또 화폭에 그려지는 도자기가 시공간을 뛰어넘어 제게 다가옵니다. 저는 실체를 알고 싶은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나를 알고 싶은 것입니다.""
'재현자'에서 '창조자'로 거듭난 그는 국내 대표 극사실화가로서의 자부심도 크다.
작품값은 100호당 1억~1억2000만원. 그는 만족하지 않는다.
놀라는 눈치를 보이자 "그것보다 10배 정도는 가격을 책정해 주어야 하는데, 우리는 한참 모자라는 상태인 것 같다"며 "제 작품가격 10억~20억은 돼야한다"고 말했다. 수십억에서 수백억하는 중국작가들의 작품에 절대 뒤지지않는다며 자신감이다. 전시는 6월 4일까지. (02)720-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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