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이예지 기자 = 영화 '타짜'(2006)에서 정 마담(김혜수)을 지키는 금이빨 보디가드 빨치산을 기억하는가. 기찻간에서 평경장(백윤식)의 손목을 자르며 강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던 배우 김경익(47)은 최근 연극 연출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배우의 탈을 벗고 무대를 진두지휘하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연출가라는 직분은 운명처럼 김경익의 삶에 다가섰다.
지난달 25일 언론과 평단의 호평 속에 막을 내린 연극 '봄날은 간다'와 '바보 햄릿'을 연출한 김경익을 최근 서울 혜화동 카페에서 만났다. 지난 2년 동안 세상과 멀어져 있었던 그는 오랜만이라는 인사에 "연출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먼 길을 돌아온 것 뿐"이라며 밝게 웃어 보였다.
김경익은 성공리에, 두 작품을 동시에 마친 소감을 묻자 "연극은 생명과 같아서 어떤 숨을 불어 넣느냐에 따라 다른 결말이 나오는데 이번 두 작품은 좋은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좋게 평가해 주시니 행복하다. 아들 같은 작품과 잠시 헤어진다니 섭섭하지만 또 다른 작품을 위해 몰두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벌써 '바보 햄릿' 팀과 함께 '아리랑 랩소디'를 준비 중이라는 소식을 전했다. 하반기면 관객 앞에 내놓을 계획이다.
김경익은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박하사탕'(1999), '타짜'(2006)를 거쳐 '사물의 비밀'(2011)까지 총 2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특히나 감독과 동료배우들이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촬영현장의 스타였다. 그런 그가 연극 연출이라니.
"제가 배우 출신인 줄 아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저는 대학생 때부터 연출이 꿈이었고 공부도 그쪽으로 했습니다. 함께 연출 공부를 하던 선배의 '연출을 잘하려면 연기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에 연기를 경험했던 것뿐이에요. 좋은 연출가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고 배웠거든요. 그렇게 시작한 연기가 좋아져서 생각보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이지 연출가의 꿈을 접은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를 통해 인기와 '돈의 맛'을 누린 그가 배고픈 연극 무대로, 그것도 연출가로 돌아오기는 쉽지 않았다.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당연히 하지 않으려 했어요. 우리나라 많은 예술인들이 그러하듯 저도 마찬가지로 '연극은 보수가 적다'는 고정관념이 있었어요. 대한민국에서 연극을 하며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런데 연극에 대한 열정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후배들을 보면서 마음을 고쳐 먹었죠. '이 후배들과 함께하면 잘해 볼 수 있겠구나' 하는 확신 같은 게 생겼어요. 그 길로 바로 희곡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영화는 카메라 앞에서 연기한다. 편집 과정을 통해 스크린 위에서 간접적으로 관객과 만난다. 하지만 연극은 연기의 민낯으로 관객 앞에 선다.
"연극 연기는 영혼을 탐색하는 과정이에요. 글자로 쓰여 있는 대본을 나만의 것으로 해석해야 하고 연기해야 해요. 제대로 된 연기를 보이기 위해서는 온전히 그 캐릭터가 되어 있어야 하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도 있어요.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나를 살펴보는 일이에요. 길게는 1년에서부터 짧게는 두어 달 동안 그 캐릭터를 품고 있어야 해요. 이제 막 연기를 시작한 후배들을 보면 영혼을 탐색하는 시간이 꽤 길어요. 제가 극단을 하는 동안은 후배들이 진정한 자기를 찾는 데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김경익이 연출한 '봄날은 간다'와 '바보 햄릿'은 공교롭게도 같은 기간에 공연됐다. '봄날은 간다'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주인공들의 상처를 치유한다. '바보 햄릿'은 모순된 현실을 부정하는 자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메시지를 담았다. 가족 간의 이야기를 그린 따뜻한 드라마 '봄날은 간다'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억하는 '바보 햄릿'이 같은 연출가에 의해 탄생됐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다르다.
정석원의 첫 연극 도전으로 화제가 됐던 '봄날은 간다'는 알고 보면 2001년 첫 공연을 시작해 2002년 동아연극상 3개 부문(작품상, 무대미술상, 남자연기상)을 수상하는 작은 기적을 만들었던 작품이다. 당시 연출도 김경익이었다. 13년 만에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작품을 위해 김경익은 과감하게 정석원을 캐스팅했다.
"2001년과 지금을 비교하자면 우선 출연진이 달라졌죠. 과거에는 김소희, 김미숙, 이승원이라는 배우를 필두로 앙상블이 위주가 되었는데 지금은 몇 명의 배우가 극을 이끌어요. 3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배우가 배치됐다는 것도 달라진 점 중 하나고요."
13년이 흘러 다시 만나는 같은 작품, 특별한 인연이다.
"이 작품을 다시 연출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준비된 카드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바로 정석원 씨죠. 영화 '사물의 비밀'에서 처음 만나 인연이 되었는데 보면 볼수록 매력있는 친구더라고요. 방송이나 영화에서 내뿜는 열정이라면 연극에서도 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어요. 그의 뚝심을 믿은 거죠. 병든 아내를 지키는 남편이라는 본질적 캐릭터와도 잘 맞다고 생각했고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를 기용한 건 '신의 한 수'입니다."
'봄날은 간다'를 통해 정석원을 재발견했다면 '바보 햄릿'을 통해서는 자신을 찾았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거대 권력에 대한 복수를 말했다면 '바보 햄릿'은 자신의 위치에서부터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하라고 주문한다. 김경익은 작품을 준비하면서 그동안 실천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반성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극에 투영시킨 이유도 그가 생전에 했던 '실천'에 대한 메시지를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등장시킨 의도가 분명합니다. 그분이 생전에 남겼던 메시지를 담아 내고 싶었으니까요. 원래는 '노무현을 사랑한 햄릿'이었어요. 몇 번의 재고 끝에 '바보 햄릿'이 되었죠. 이건 정치적인 이야기가 결코 아니에요. 우리의 작은 행동이 미래의 삶을 결정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을 뿐이죠. 좌파나 빨갱이 같은 정치적 단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작품이에요. 관객들은 정서적으로 많이 공감하시더라고요. SNS에 올라오는 리뷰를 볼 때마다 '진심이 통했구나' 싶어 울컥해요. '바보 햄릿'에 대한 애정이 큽니다. 재미있게 작업했어요. 내가 만든 작품을 본 관객들의 마음이 움직일 때 연출에 대한 매력을 느끼죠. 이런 게 인생 아니겠어요? 하하."
김경익을 조만간 스크린에서 다시 볼 수 있을 듯하다. 10년 차 부부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관계'에서 정신과 의사 영욱 역을 맡았다. 영화 연기와 연극 연출을 오가며 이중생활 중인 그가 생각하는 '최악의 영화'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타짜'였다.
"더 잘할 수 있었어요. 많은 사람들은 저를 '타짜'의 빨치산으로 기억해 주시는데 저는 조금 창피한 작품이에요. 변명하자면 당시에 다른 영화를 동시에 찍고 있었어요. 두 편의 단편 영화를 통해서 선생님, 정신과 의사를 연기했는데, 세 캐릭터를 오가야 한다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더라고요. 제가 보면 알아요. 내가 열심히 연기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요. '타짜'에서는 열심히 하지 못 했던 것 같아요. 앞으로도 그렇습니다. 스스로 창피하지 않은 작품을 하고 싶어요. 그게 연기든 연출이든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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