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수교 22주년] 시진핑도 언급한 한중 양국 역사 속 우호교류 ‘산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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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08-2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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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복, 김교각, 최치원, 등자룡 소개

지난 7월초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한중 양국간 우호를 강조하고 있다. [사진=남궁진웅 기자]


아주경제 배인선 김근정 배상희 기자 =신선을 찾아 동쪽 제주도로 온 서복(徐福), 구화산에서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 김교각, 당나라 때 중국에서 유학하며 관직에 오른 '동국 유학의 대가' 최치원 선생 등 한국과 중국 국민간 우호왕래, 상부상조의 전통은 유래가 깊습니다. <7월 4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서울대 강연 중>

24일은 한·중 수교 22주년이 되는 날이다. 비록 반세기 가까이 단절됐던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지는 2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양국은 사실상 수 천년 전부터 우호교류를 이어온 것은 역사 속에서도 잘 나타난다.  지난 7월 초 한국을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 수천년 역사를 되돌아보며 한·중 우호와 관련한 미담을 소개했다. 시진핑 주석이 당시 언급한 역사 속 인물을 중심으로 양국간 수천 년의 교류 역사의 흔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불로초 찾아 제주도에 온 서복
 

서복기념관 서복석상.[사진=제주도 관광정보 사이트]


중국 역사서 사기(史記)는 서복(徐福)을 기원전 210년 중국 진시황(BC 259~BC 210)의 명을 받고 배 60척과 동남동녀 3000명을 비롯 수 천명이 넘는 선단을 이끌고 불로초를 찾아 중국 친황다오(秦皇島)에서 동쪽을 향해 떠난 인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서복은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지 못하고 종적을 감췄다. 서복이 어디로 떠났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제주도 서귀포시에는 서복이 정방폭포 해안에 닻을 내리고 영주산(한라산)에 올라 불로초를 구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서복이 정방폭포의 암벽에 ‘서불과지(徐市過之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글귀를 새겨놓고 서쪽으로 돌아갔는데 서귀포라는 명칭이 여기서 유래됐다는 설도 있다. 서복이 제주도에 실제로 왔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서복이 2000여 년 전 고대 한국과 중국 양국 교류의 여명기에 서막을 연 인물임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하다.

이에 제주도 서귀포시는 한·중 우호 관계를 다지는 차원에서 구전으로만 전해지던 서복 전설을 문화관광 스토리텔링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지난 2005년엔 한중친선협회(이세기 회장)과 함께 서복 기념관을 만들었다.

서복기념관 설립에 중국도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산둥(山東)성 당서기였던 장가오리(張高麗) 현 부총리는 서복 석상을 기증했으며, 원자바오(溫家寶) 전 총리도 ‘서복공원’이라 적힌 친필 휘호를 보내왔다. 친황다오에서 보낸 ‘서복동도상 徐福東渡像)’도 서복공원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시진핑 주석을 비롯해 류윈산(劉雲山) 현 정치국 상무위원, 차이우(蔡武) 문화부장 등 중국 지도부 인사들도 제주도를 방문할 때마다 서복 기념관에 들러 한·중간 우호관계 증진을 강조하며 이제 서복기념관은 한·중 우호의 상징물로 자리잡고 있다.

△구화산에서 등신불이 된 신라 왕자 김교각
 

구화산 지장보살 김교각 동상. [사진=바이두 인터넷사진]


"지옥이 텅 비기 전까지는 성불하지 않겠다(地狱不空誓不成佛)”. 불교신도가 아니더라도 중국인이라면 흔히 알고 있는 지장보살 존재의 의미를 담은 구절이다. 중국인에게 친숙한 지장보살은 사실 통일신라 시대 왕자 김교각이다. 

중국에는 4대 불교 명산 4대 보살이 있다. 이중 안후이(安徽)성 구화산(九華山)의 대원(大愿地藏)지장보살이 바로 김교각이다. 김교각은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동일시되며 중국 내 많은 불도들의 우러름과 숭배를 받고 있다.

김교각은 통일신라 성덕왕의 큰 아들로 714년 18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김교각은 당 현종과 교류하고 벼슬을 받는 등 두각을 나타냈으며 중국 최초 사찰인 백마사 등을 방문하며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다 4년 뒤 귀국해 어지러운 정세에 돌연 출가를 결심하고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 화성사(化城寺)에 자리잡고 불도를 설파, 국내외로 높은 명성을 떨쳤다. 794년 99살의 나이로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작별인사 후 입적했는데 3년이 지나도록 시신이 썩지 않아 사람들은 그를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여겼다. 

이 역사적 사실은 한중 양국 교류와 문화적 교감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다. 지난 7월 서울대 강연에 나선 시진핑 주석은 물론이고 2007년 한국을 찾은 원자바오 전 총리도 " 당나라 때 신라 왕자 김교각이 구화산에서 불법을 수행하여 후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불렸다"며 한중 교류의 깊은 역사와 인연을 강조했다.

1998년 중국 런더(仁德)대승이 "살아 생전에 구화산에 지장보살 동상을 세워 지장보살과 절을 찾는 이들이 그를 존경하고 우러르게 하고 싶다"고 제안한 것을 계기로 지난 해에는 김교각 동상도 세워졌다. 구화산에 가면 세상의 중생을 내려다보듯 서 있는 99m의 김교각의 동상을 직접 볼 수 있다.

△당나라 유학생 신라 학자 최치원
 

중국 양저우 최치원기념관 최치원 석상

“푸른바다에 배를 띄우니 긴 바람이 만리를 통한다(掛席浮滄海 長風萬里通).” 통일신라시대 학자 고운(孤雲) 최치원 선생의 한시 ‘범해(泛海)’에 등장하는 시구다. 지난 해 6월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당시 시진핑 주석이 라오펑여우(老朋友·오랜 친구) 박 대통령에게 건넨 환영사로 과거부터 지금까지 유구하게 이어져 온 한중 양국 관계가 앞으로 더욱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년이 지난 올해 7월 한국을 답방한 시 주석은 서울대 강연에서 재차 최치원을 언급하며 “(한국과 중국은) 수천년을 걸쳐 누구보다 두터운 정을 쌓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중국에서 최치원은 한중 양국 문화교류에 이정표적 의미를 남긴 ‘한중 수교의 선구자’로 알려져 있다.

통일 신라시대 최치원은 당나라 수도인 장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으로 유학을 가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해 중국 대륙 곳곳을 누비며 한국에서 온 우호사절로 양국 문화의 가교 역할을 했다.

중국에서 펼쳤던 활동들이 기록된 최치원의 시문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최치원이 장쑤성 양저우(揚州)시에서 관리로 재직할 당시 집필한 시문집 ‘계원필경(桂苑筆耕)’에는 당시 양저우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중 당나라 때의 반란군 황소(黃巢)를 토벌하기 위해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과 관련해 당시 중국인들 사이에서 ‘황소를 격퇴한 것은 칼이 아니라 최치원의 글이다’는 말이 회자가 됐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양저우시는 해마다 10월 15일을 ‘한중 우호 교류일’로 지정하고 이를 새로운 양국관계 발전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아울러 ‘최치원이 거쳐간 곳’이라는 비석과 최치원 기념관도 설립해 그가 한중교류를 위해 이뤄낸 족적을 기리고 있다. 중국 정부나 언론도  최치원이 남긴 문화를 주제로 다양한 영상물을 제작하는 등 그의 사료 발굴과 보호에 적극 나서고 있다.

△이순신 장군과 전우애 나눈 등자룡
 

등자룡 장군상[사진=바이두]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전사한 명나라 등자룡(鄧子龍) 장군은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인물이지만 중국에서는 애국 장수로 추앙 받는 민족 영웅이다. 그의 고향인 장시(江西)성 펑청(豊城)시에 가면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자룡로, 자룡화원, 자룡진료소 등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명나라 때 강서내란을 진압하고 미얀마 군대를 물리치는 등 일생 동안 전쟁터에서 활약한 등자룡 장군은 조선이 왜적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자 70세가 넘은 나이에 노구를 이끌고 진린(陳璘이 이끄는 명나라 수군의 부제독으로 왜란이 일어난 조선 원병에 나섰다. 등자룡 장군은 1598년 노량해전에서 왜구를 물리치던 중 적군의 칼에 맞아 이순신 장군과 나란히 전사했다. ‘샘물이 마르자 물고기들이 서로를 침으로 적셔주었다’는 시진핑 주석의 말처럼 등자룡 장군은 어려울 때 조선을 도운 의리의 사나이였던 것이다.

당시 조선도 등자룡 장군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등자룡 장군의 유해는 이순신 장군과 함께 당시 수군 본영이었던 완도 고금도에 안치됐다. 왜란 당시 왜병은 등자룡 장군의 수급을 베어가지고 도망간 탓에 등자룡 장군의 시신엔 머리가 없었다. 이에 조선 선조는 특별히 나무로 목을 만들어 등 장군의 시신을 정성스레 잘 모셨다고 전해진다. 또 정조는 등자룡 장군의 위패까지 이순신 장군과 함께 관양묘(현 충무사 전신)에 배향하고 친히 제문을 지었다. 등자룡 유해가 고향으로 운구되기 전까지 임진왜란의 두 명장은 고금도에 한 동안 가묘로 같이 누워 있었다. 이순신 장군과 등자룡 장군은 국적은 다르지만 전우애를 함께 나눈 전장의 동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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