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한지연 기자 = "저기요. 여기 못 보던 사람이 끼어들었어요. 조치 좀 취해주세요."
11월 6일 오전 6시 30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서울 명동 H&M 눈스퀘어점 앞은 냉기와 함께 팽팽한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이곳에는 20∼30대 젊은 남녀 수백여명이 모여 있었다. 두꺼운 패딩점퍼와 마스크, 모자 등으로 무장한 이들은 콘크리트 바닥 위에 신문지·돗자리 등을 깔고 있었다. 스웨덴 SPA(제조·유통 일괄형 의류) 브랜드 H&M과 알렉산더왕의 협업 한정판 제품을 구입하기 위해 모여든 것이다.
가장 먼저 입장하는 1그룹에 속한 김모씨(29)는 "지난 11월 4일 저녁 7시부터 기다리기 시작해 명동에서 무려 2박 3일을 보냈다"며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고 말했다.
같은 시작 서울 압구정동 H&M 매장도 상황은 마찬가지. 이곳에서도 지난 4일 저녁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해 비슷한 시각, 350여명을 훌쩍 넘어섰다.
오전 7시30분이 되자 명동 매장 앞의 대기인원은 450여명으로 늘었다. 고스톱으로 지루함을 달래는 사람부터 무릎에 이불을 두르고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 캠핑용 간이의자에서 쪽잠을 자는 사람 등 다양했다.
직장동료들과 함께 왔다는 김모(26)씨는 "인천에서 출발해 새벽 3시쯤 도착했는 데도 16그룹에 속했다"며 "50만~100만원 정도 쇼핑할 생각으로 왔는데 입장 시간이 11시경이라 그때까지 원하는 물건이 남아있을 지 걱정"이라고 초조해했다.
매장 오픈 시각이 가까워오자 자리 선점을 두고 얼굴을 붉히는 사람들도 늘었다. 배치된 경호원은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이날 H&M 측은 대기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30명의 경호원을 배치했다. 인근 출근하는 사람들은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업체 측은 형평성을 고려해 선착순 30명씩 한 그룹을 구성, 10분간의 쇼핑시간을 제공했다. 한 사람 당 제품별로 1개 구매제한도 설정했다. 48시간 이어진 노숙의 결과는 10분 안에 결정된다. 오픈이 시작되자 운동화 끈을 고쳐 매며 전의를 다지는 이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H&M 관계자는 "매장 오픈이 8시부터인데 이미 서울 두 곳에서만 대기인원이 900명을 돌파했다"며 "지난해보다는 적은 인원이지만 올해는 남성들이 전체 고객의 70%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반응이 폭발적"이라고 말했다.
◆ 알렉산더왕 한정판이 뭐길래?
H&M은 지난 2004년부터 SPA브랜드 최초로 유명 디자이너와의 협업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샤넬을 시작으로 랑방·베르사체·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이자벨마랑 등 유명 디자이너들과 매년 협업했다. 1년에 한두 번 출시되는 제품은 대부분 판매 첫날 품절된다. 이번에도 남성용 가방·스웨트셔츠·코트 등 일부 아이템은 판매 2시간 만에 동이 났다.
이번에 H&M과 함께한 알렉산더왕은 한국은 물론 유럽·미국·일본 등 전 세계에 두꺼운 마니아층을 거느리고 있는 신흥 명품 브랜드다.
협업제품은 한정판으로 제작된 까닭에 전 세계 2600개 매장 가운데 250곳에서만 공개됐다. 한국에서는 H&M 명동 눈스퀘어점, 압구정점, 부산 신세계 센텀시티점, 대구 동성로 점, 인천 신세계점 등 5곳에서만 판매됐다.
특히 남성 제품의 경우 압구정점과 명동에서만 판매, 이곳은 남성들의 관심이 뜨거웠다. 올해 밤샘 대기 행렬에 남성들이 유독 많이 동참한 이유다.
H&M측은 "전체 고객의 약 70% 이상이 남성인데 이는 지난해보다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라고 했다.
상품 가격대는 티셔츠가 6만~15만원, 가방 10만~30만원, 원피스·재킷이 10만~50만원 선이다. 신발과 글러브, 안경 등도 30만원 안팎이다. 가장 비싼 제품도 50만원을 넘지 않는다. 알렉산더왕의 제품이 수백만원대를 호가하는 것과 비교하면 매우 저렴한 편이다.
◆ 70대 노숙알바도 등장
매년 H&M의 콜라보레이션 제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는 명품을 합리적인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매장에서 만난 홍모씨(29)는 "평소 좋아하던 유명 디자이너 제품을 90% 이상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는 극히 드문 기회"라며 "3개월 아르바이트해서 모은 200만원을 다 쓰고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70대 노숙알바도 등장했다. 안모씨(72)는 "어제부터 대기해 좋은 자리를 3곳 정도 맡아 놨다"며 "마음에 들면 일당 10만원을 받기로 했다"고 귀띔했다.
한정판 제품은 소장가치도 높아 웃돈을 붙여 되파는 사람들도 많다.
해마다 협업제품을 수집한다는 박모씨(32)는 "콜라보레이션 제품은 오픈 당일 3~4시간 내에 완판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 수록 값이 뛴다"며 "맞지 않는 제품은 지인이나 온라인을 통해 재판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