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 사회에 첫발 내딛다" 故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의 '인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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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4-11-09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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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


아주경제 정치연 기자 = 한국 섬유산업 개척하며 대한민국 경제발전을 이끈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8일 향년 92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도와 주경야독을 하며 코오롱그룹을 성공적으로 키워낸 대한민국 1세대 기업인으로 불린다. 고인의 험난했던 성장과정과 인생사를 정리했다.

우정(牛汀) 이동찬 명예회장은 1922년 4월 1일 경북 영일군에서 이원만 창업주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호방한 성격의 창업주 이원만 선대회장(전 기업인, 전 국회의원)이 일본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기에, 이동찬 명예회장은 고향에서 넉넉지 않은 유년시절을 보내야 했다.

그런 가운데도 소학교를 수석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포항에 있는 일본인 상점의 점원으로서 사회에 첫 출발을 내딛게 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도일(渡日) 하라는 부친의 편지를 받고 일본으로 떠나 당시 부친이 설립한 ‘아사히공예사’에서 열다섯 살의 나이로 경리를 맡아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낮에는 일터에서 일을 하고 밤에는 ‘흥국상업학교’ 야간부에 들어가 주경야독의 생활을 했다. 이후 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어느덧 청년이 됐지만 학구열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와세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던 조선인 교수의 권유로 시험을 준비해 이후 와세다 대학의 정치경제학부에 당당히 합격해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입학한 후에도 평소의 취미와 소질을 살려 정구, 축구, 기마 등의 스포츠는 물론 영어회화부, 변론부 그리고 정치학회인 동아협회 같은 학내 동아리에 적극 참여하며 대학시절을 보냈다.

1944년 1월 13일 이 명예회장은 스물셋의 나이에 입영 1주일을 앞두고 신덕진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결혼한 지 1주일째인 1월 20일, 쯔루가(敦賀)의 중부 36연대에 조선학도특별지원병으로 입대해 식민지 청년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울분과 고난을 겪으며 조국해방과 부국의 꿈을 키우던 중 조국은 해방을 맞았다.

광복 후 귀국한 청년 이동찬은 한국전쟁의 여파로 국민의 기초생활마저 위협받던 그 때,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하여 사회봉사와 애국을 실천하겠다는 신념아래 경북기업이라는 직물공장을 설립하며 이 땅에 섬유산업의 횃불을 처음 들어올렸다.

이동찬 명예회장은 더 큰 사업에 뜻을 품고 경북기업을 정리한 후 상경하여 단칸 사무실에 삼경물산 서울사무소와 후일 코오롱상사㈜의 모태가 되는 개명상사를 1954년에 설립, 한국과 일본의 무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며 나일론의 개화기를 앞당겨 나갔다.

1957년 4월 12일, 부친 이원만 선대회장과 함께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창립하고 우리나라 최초로 나일론사를 생산하며 한국 섬유산업의 기수로 등장해 한국 섬유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당시는 나일론사가 큰 인기를 얻으면서 품귀현상까지 빚었던 시기로 한국나이롱은 1963년 국내 최초로 일산 2.5톤 규모의 나일론사 준공을 시작으로 1967년 공장을 증설, 10톤 공장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한국의 섬유산업을 개척하며 증흥의 밑거름을 마련한 것이다.

나일론사의 수요확대에 따라 1968년 판매전담회사로 코오롱상사를 창립, 이동찬 사장이 초대 사장에 취임하였다. 당시 사장 취임사를 통해 밝힌 이 명예회장의 경영지침은 향후 코오롱그룹의 반세기 역사 속에 뿌리 깊게 전해져 오고 있다. 당시 이동찬 사장은 기업의 건강한 이윤추구를 통해 소비자를 보호하고 국가발전에 기여하는 등 ‘사회적 책임을 다하겠다는 약속’과 내적인 충실도를 높여 확고한 기반 위에서 회사를 육성, 발전시켜나가겠다는 ‘안정을 바탕으로 한 발전’을 선언했다.

이어 폴리에스터사의 제조에도 착수하여 1968년 한국폴리에스텔 등을 설립하게 되었고, 1970년 한국나이롱 사장에 취임하면서 원숙한 경영인으로서의 길을 걷는다. 1960년대와 1970년대는 국내 나일론섬유업계의 호황기인 동시에 화섬업계가 크게 도약한 시기였다.

설립 20주년이 되던 1977년 코오롱그룹은 그룹의 종합적인 발전과 경영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그룹 회장제를 신설하고 이동찬 대표이사 사장을 코오롱그룹의 회장으로 추대했다. 코오롱그룹의 최고경영자가 되기까지에는 열다섯 살의 나이로 부친인 이원만 선대회장을 도왔던 때로부터 기산하면 실로 40년 만의 일이자, 경북기업의 설립으로 본격적인 사업가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로부터 셈하더라도 3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린 셈이었다.

이 명예회장은 취임 후 신년사를 통해 경영다각화의 성공적인 출발을 기뻐하며 기업의 생명과 같은 경쟁력의 제고를 강조했다. 그리고 회장 취임해인 1977년, 한국나이롱과 한국포리에스텔을 주식회사 코오롱으로 상호 변경하였으며 급변하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여 제조업에 첨단 경영을 도입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0년대 나일론사 공급이 수요를 앞지르게 되자 한국나이롱은 사업다양화와 제품다양화를 모색하며 타이어코드 등 신제품 개발에 주력하였다. 격동의 1980년대에 들어서는 ‘변신’이라는 모토아래 기존의 섬유산업은 양적, 질적 성장을 함께 도모하면서 필름, 비디오테이프, 메디컬 등 관련 사업 분야로 사업영역을 확대해 사업다각화에 성공하며 오늘날 코오롱그룹을 국내 유수의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1983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 섬유인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섬유백서>를 발간하는 등 한국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썼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21세기형 산업의 총아로 떠오른 정보통신산업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그룹 내에 정보통신회사를 설립해 집중 육성하였다.

또 다른 신성장 산업의 하나인 유통업에도 적극 진출함으로써 코오롱그룹을 21세기 신경제의 주체로서 자리 잡을 수 있는 확고한 교두보를 마련해 놓았다. 이원만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제2대 그룹회장에 오른 이 명예회장은 재임기간 동안 그룹 총수로서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코오롱을 명실상부한 그룹으로 성장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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