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홍종선 기자 = 영화를 볼 때 경험하는 발견의 재미, 매번 느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더 귀한 재미다. 때로 감독의 이름과 전작들이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고, 음악이 귀에 쏘옥 들어오기도 하고, ‘저 배우지 누구지, 어디서 봤더라?’ 눈이 번쩍 뜨이는 때도 있다. 배우일 때, 우리는 특별히 ‘신 스틸러(scene stealer)’라 부르며 반긴다.
캐스팅에 공들인 영화 <허삼관>(연출 하정우, 제작 ㈜두타연‧㈜판타지오픽쳐스)에는 여러 신 스틸러가 등장하는데, 특히 하소용(민무제 분)에게 눈길이 좀 더 길게 멈추고 흥미가 돋는 이유는 그야말로 본 적이 없는 배우가 제법 큰 역할을 능청스럽다 싶을 만큼 자연스럽게 소화해서다. 2015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어 새로운 발견을 배제하지 않지만, 첫 출연에 빅스타 하지원의 애인으로서 기울지 않고 연기파 전혜진의 남편으로서 기죽지 않은 민무제만한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만큼 그는 인상적이다.
그를 만났다. 몇 번의 만남, 때로 진지한 인터뷰 혹은 술잔을 나누는 취중진담 속에서 느낀 민무제라는 배우는 놀랍게도 텅 비어 있다. <허삼관>에서의 개성적 연기, 튀지 않으면서도 강렬함을 내뿜는 연기를 할 정도의 배우라면 사람으로서의 색깔이 좀 진해도 좋다고 생각했는데 깨끗한 느낌의 단색이다. 하소용 연기에서 본 입에 착 감기는 맛이 조미료가 아니라 만 서른여섯 늦깎이 데뷔 전에 우려진 곰탕의 맛이었나. 무제, 수학 공책도 아니고 국어 공책도 아니고 일기 공책도 아닌, 어느 과목에든 쓸 수 있는 무제 공책처럼, 그는 삶 속에서 준비되고 단련된 배우였다.
“어린 시절 외국생활하면서(그는 이십대 중반, 연극공연을 하며 유럽을 돌 생각을 하고 떠났던 배낭여행 중, 가세가 기울어 당시 머물고 있던 이탈리아에서 곧바로 가이드 일을 시작하며 생활인으로 십년을 살았다) 어른들하고 지냈어요. 눈치를 보고, 나서야 할 때를 알고 들어야 할 때를 알게 됐죠.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당시에는 일단 잘못했다고 가만히 있고 며칠 뒤 찾아가 사실은 이러하다고 내막을 말씀드리곤 했어요. 그게 존중이고 공경이라고 생각했죠. 타지 생활하면서 먹은 눈칫밥, 그 결이 쌓이고 쌓이면서 저도 모르게 그런, 무엇을 담아도 될 것 같고 어떤 색을 칠해도 될 것 같은 텅 빈 느낌이 생긴 게 아닌가 싶어요. 적절한 대답인지 모르겠지만 그렇습니다. (민망한 듯) 근데 모두가 그렇게 살아오고 살아가셔요. 다 고생하고 살아가는 거지만, 제 안의 고생하고 살아온 경험들이 응집돼서 그렇게 느끼시는 게 아닌가 싶어요. 경쟁력이요? 경쟁력까진 아니고, 그런 부분이 배우인 저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하정우가 연출에 주연을 더한 영화 <허삼관>에서 민무제는 허삼관(하정우 분)의 아내 허옥란(하지원 분)의 혼전 애인이자 송씨 부인(전혜진 분)의 남편으로 등장한다. 허씨 부부의 장남 일락(남다름 분)의 친아버지로, 영화에 갈등의 씨앗을 제공하는 인물이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 그가(이전에 봤다면 기억하지 않을 수 없게 개성 있는 마스크다) 이토록 중요한 배역을 맡게 된 데에는 하정우라는 연결고리가 있다. 두 사람은 중앙대학교 연극학과에서 함께 수학했다. 나이는 같지만, 민무제가 학번은 하나 위다. 야인을 중앙무대로 불러낸 이가 <허삼관>의 감독 하정우인 만큼 민무제의 배우 이야기를 하자면 대학후배 하정우, 연기선배 하정우, 감독 하정우가 자연스레 엮인다.
“대학 시절, 이미 쟁쟁한 선배들이 많이 계셨죠. 저처럼 무명인 동료들 가운데선 하정우 후배와 김강우 후배가 눈에 띄었어요. 아, 저 친구들은 뭐가 돼도 되겠구나. 제가 소극장에서 같이 연습하자고 제안했어요, 함께 성장하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제가 선배니까 (공동 연습은) 잘 안 되더라고요. 그래도 친하게 지냈어요. 신기하더라고요, 선구안이랄까 적중률이 있었던 거죠. 시간이 흐르고 외국에서 바라봤을 때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구나, 싶을 만큼 두 배우가 잘 돼서 좋았어요.”
선배로서 후배 하정우는 어떤 사람인가요? “상당히 예의 바르고…. 웃겨요, 사람을 상당히 기분 좋게 하죠. 댄디해요, 선배든 후배든 자기를 내려놓고 깍듯하게 대합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맡아서 무슨 일을 해야 할 때는 자기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사람입니다.”
민무제라는 배우를 알기 전, 하정우에게서 재학 시절 연극 ‘카르멘’에 돈 호세 역할로 공동 캐스팅됐던 남자 얘기를 들은 적 있다. 믿고 보는 배우라 불리는 그가 ‘질투심을 느낄 만큼 카리스마를 지닌 형’이라고 표현했다. 그가 민무제다.
“아휴, 겸손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예요. 당시에 누구나 김성훈(하정우 본명)네가 잘할 거라고 예측했어요. 실제로도 전반적 시선은 제가 속한 ‘B팀 못한다’였어요. 여주인공 맡은 친구와 나서서 팀원들과 함께 거의 한 달, 새벽까지 노력했어요. 못하는 건 못하는 거, 해서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지만, 하는 데까진 해 봐야 하잖아요. 어린 시절의 작업이라는 게 결과물을 놓고 판단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다만 (노력으로 올린) 마지막 공연이 빛을 발해서 좀 좋아 보였나 봐요. 비교 대상이 될 수가 없죠.”
영화인 하정우가 되기 이전, 연기 수업을 하는 김성훈과의 일화는 계속됐다.
“소통을 시작하고 친해진 계기가 된 건 맞아요. 함께 포스터 등에 쓸 이미지 사진을 촬영하는데, ‘아, 이렇게 캐릭터의 뭔가를 찾아 가는구나’ 느껴질 정도로 (성훈이가) 잘했어요. 대본에 디테일하게 움직임을 적어 놓은 것도 대단했고요. 보통 더블 캐스팅끼리 그런 내용들 공유 않는데 제가 ‘같이 하자, 내가 배울 거 있으면 배우고’ 했어요. (성훈이) 성격이 흔쾌히 '그러자' 하는 터라, 그 친구 차 뒤에 누워서 음악 틀고 같이 다니고 술 먹고 얘기하며 서로의 ‘돈 호세’를 만들어 갔죠. 원래 부유한 친구들도 있었지만 둘 다 힘들었을 때였는데, 없으면 없는 대로 술을 마셨어요. 형 노릇한다고, 소주 먹고 집까지 걸어가고, 그 정도 아깝지 않은 친구였어요. 그 시간들이 제겐 아주 소중해요. 진실 되게 얘기했어요, 가족 환경에 대해서도 공유하고, 굉장히 좋았습니다.”
민무제는 대학교에서 연기를 전공했는데, 몸을 자유스럽게 표현하고 싶어서 ‘전미례재즈무용단’에서 춤을 배웠다. 1,2학년을 프로댄서로서 공연을 다니며 자신의 욕망과 꿈을 직시하게 됐다. 몸보다 말로 표현하는 에너지를 가진 배우가 돼야겠다는 결심이었다. 군대에 다녀와 ‘신씨뮤지컬컴퍼니’에 들어갔다. 춤추고 노래하면서, 노래에도 말이 있지만 대사를 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어떤 예술인,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욕망은 그렇게 몸을 던진 경험 속에서 구체화됐다.
“학교로 돌아와 ‘카르멘’을 만나고 ‘아, 내가 대사를 할 수 있구나’ 확인하며 한참 꿈이 충만했어요. 예전에 선배 형과, 둘 다 군대 다녀와 학교에 있으면 여행가자, 했었고 세계연극페스티벌 무대에서 공연도 하고 여행도 하며 유럽을 다니게 된 것도 그 연장선에 있었습니다. 식견을 넓히면 배우생활 하는데 좋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컸죠. 1년이 목표였는데, 뜻하지 않게 다른 일을 하게 됐네요.”
“처음에는 3년 정도 체류하면 돌아갈 수 있겠다, 3년만 가장 노릇 하자 했는데, 영화 <로마의 휴일> 그레고리 펙 대사처럼 인생이 내 마음대로 되지 않잖아요. 그렇게 조금씩 배우의 꿈이 멀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더 늦으면 안 되는데, 안 되는데, 하면서요.”
이탈리아 생활 5년 만에 잠시 한국에 들어왔을 때, 민무제가 찾은 건 하정우였다.
“누구 김성훈 전화 번호 아느냐, 수소문했어요. 전화를 반갑게 받아 주더라고요. 형 어디 있느냐고, 볼 수 있느냐고요. 그 뒤로 매년 올 때마다 밥 먹고 술 한 잔 하면서 같이 보냈네요.”
아직 배우의 꿈을 간직한 생활인 눈에 비친 하정우의 해를 거듭한 승승장구. 배우가 되는 길에 자극제가 됐을까, 주눅의 기제가 됐을까.
“참 잘될 친구라 생각했었기 때문에, 그의 성공은 그저 수순이라고 여겨졌어요. 다만 안타까운 것은 어머니가, 너도 우리 아니었으면 배우하며 살고 있었을 텐데, 말씀하시는 거였죠. 물론 배우의 길에 들어섰다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아무것도 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자신을 이토록 관조한다는 게 쉬운 일일까. 누구나 자신에 대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과대평가하고 살지 않던가. 민무제의 말은 느릿하지만 사람의 귀를 열게 하는 마력이 있다.
“때문에 하정우의 성공이 자극제가 됐다기보다는 제 안의 무엇이 결국 저를 배우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는 게 맞는 얘깁니다.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죽기 직전에 후회할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봤어요. 돈보다 내가 이것을(배우를) 안 해 본 것을 후회하겠구나, 싶더라고요. 당장 돈이 없어서 빚지고 살 상황 정도는 아니고, 결혼해서 부양할 가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임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안 할 이유는 없었어요. 그때가 우리 나이로 서른여섯, 2년 전입니다.”
그는 배우로 다시 선 이후의 이야기, <허삼관>에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깍듯이 하정우 감독, 하 감독님이라고 칭했다.
“그때부터 행운이 커지기 시작한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경제적 여유를 얻고 부모님께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고, 돈의 노예가 되면 안 되는데 경계하던 순간 하정우 감독에게서 러브콜이 왔어요. 아시지만, 하소용 역을 보장받고 온 건 아니에요. 오디션이 있다는 얘기만 들었고, 밑에서부터 기어서 하자는 마음으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하 감독님께서 생각보다 너무나도 좋은 역할, 남들이 보면 이해 안 되게 큰 역할을 맡겨 주셨어요. 몇 년 배역이 없더라도 배우 하자, 했던 건데 덕분에 빨리 풀리고 있습니다. 믿어 준 감독님께 감사드립니다.”
짧다 할 수 없는 길을 돌아와 운명처럼 배우가 된 민무제. <허삼관>에 출연하며 무엇을 목표로 했을까. 작품이 필요로 하는 배역에 대한 무난한 소화, 배우 민무제의 각인, 욕심이 날 법도 하다.
“배우 민무제의 각인이요? 생각할 수도 없어요. 저 친구 누구야? 배역 너무 큰 거 아니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요. 영화 작업 처음 해 봤어요. 카메라 어디를 봐야 할지, 영화가 어떻게 찍어지는지도 몰랐죠. 공부하며 촬영했어요. 영화라는 작업과 그 현장에 적응하는 게 첫 번째 목표였죠. 부담감이 말도 못 했어요. 하 감독님의 말이 제게 아주 큰 힘이 됐습니다. 타석에 서면 늘 홈런이나 안타를 치려 하니 연기에 문제가 생긴다, 마음을 비우고 세 번 들어가 한 번만 친다는 맘으로 연기해라. 각인은 아직은 제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제가 맡은 배역을 받아들였을 때, 원활하게 소화하게끔 하는 게 제일 중요했어요. 앞으로 다른 작품을 만났을 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제가 가진 걸 편안하게 보여 줄 수 있는 ‘시작버튼’이 되어 주길 바란다면, 너무 큰 욕심일까요?”
민무제에게 있어 하소용 연기를 위해 가장 힘쓴 부분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현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스태프나 영화사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눌리면 안 된다는 생각을 거듭했다. 산에 다녔다, 혼자 걷고 생각하며 마인드 컨트롤에 힘썼다. 그런 민무제에게 감독 하정우는 다시 한 번 힘을 주었다. ‘내가 오케이를 쉽게 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케이라고 하면 나를 믿고 따라와라’, 민무제에게 큰 용기가 된 말이다.
“제가 부족한 줄 알지만 감독님이 영화를 만드시니 나는 그에 맞춰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임했습니다. 영화 첫 촬영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게 해 주신 것도 신인인 저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기회였어요. 저는 알죠, 제가 턱없이 부족한 거. 부족하지만. 이게 시작이고, 시작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카메라 앞에서 좀 더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스스로 격려해 봅니다.”
그래도 대학 후배이고, 오랜 친구인데 하정우에게 경어까지 쓰는 이유를 물었다. “일이라는 게 바라보는 관점이 중요해요. 저 역시 영화 시작되면서 동생으로 생각 안 했어요. 마음 자체를 그렇게 갖는 건(동생으로 생각하는 건) 프로의 세계에서 프로같이 일하는 게 아니라고 봐요. 공과 사를 구분해 일했습니다. 감독 하정우도 마찬가지에요. 평소 사람 좋아하고 술자리 담소 좋아하지만 감독을 맡고서는 (오후) 11시가 되면 신데렐라처럼 자리에서 일어섰어요. 어떻게 참고 갔을까, 뒤돌아보니 철저히 준비해서 잘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준비를 잘하고 싶은 열망, 자기도 잘 모르는 길을 가면서의 노력, 후회하지 않게끔 노력했던 모습…, 일상생활부터 레귤러를 지킨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그러기 어렵지 않나요? 제가 보면, ‘그림을 다 그릴 줄 아는구나, 이미’,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영화에 대해 정통해요. 서른 작품 이상하며 쌓은 경험도 있고, 게다가 센스가 너무 좋으니까. 센스는 개인의 달란트예요, 원래도 좋았는데 여러 작품을 통해 더 좋아졌는데, 그런 노력들을 하더란 말이죠. 하정우는 정말 다른 것 같아요.”
출연 배우에게 이 영화는 어떤 작품이냐고 묻는 건 때로 고역일 게다. “잔잔한 감동이 있는 영화예요. 크게 한 방 때리지 않지만 영화관 나오면서,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서도 먹먹하지 않을까요. 여운을 길게 가져갈 영화입니다. 가져가는 감정의 길이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요”.
남보다 빠르진 않았지만 늦었다고 할 수 없는 나이에 역시나 배우가 돼야겠다고 결심했을 때, 스스로 배우로서의 정체성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배우 민무제의 아이덴티티를 물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아직 그 질문에 답할 정도는 못 되고요. 대신 이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대학 때 ‘나는 B다, A가 될 수 있지만 현재는 B다’라고 생각했어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매력 있고 개성 있는 배우, 욕심나죠. 그런데 그에 앞서, 제가 정말 좋아서 하는 걸 관객이 보시고 ‘아, 좋아서 하는구나’ 알아봐 주시면 감사하겠어요. 단기간 할 게 아니니까 오래 하는 동안 점차 민무제라는 사람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주관적인 얘기가 되겠지만, 배우 민무제의 얼굴은 한국에서 보기 드문 개성적 마스크다. 나이를 알 수 없는 존재적 무게감도 있다. 따뜻할 것 같기도 하고, 잔인할 것 같기도 하고, 모든 게 가능할 것 같은 생김새와 아우라를 지녔다. 무엇보다 그의 미래를 기대하는 것은 가슴에 들어 있는 불덩이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 그것을 조절할 줄 아는 능력이 보인다. 다음 작품을 기다리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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