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김래원은 들뜨는 법이 없었다. “지난해 ‘별에서 온 그대’ 이후 끝이 보이지 않는 침체기에 빠진 SBS 드라마국을 ‘펀치’가 살려냈다”는 여론의 평가에도 “좋은 작품을 보여드릴 수 있어서 행복했다”고 답할 뿐이었다.
“영화 ‘강남 1970’ 촬영을 끝내고 바로 드라마에 투입돼 1년 7개월을 쉬지 않고 달렸다”는 그는 “생각해 보면 ‘강남 1970’에서 내가 연기한 용기와 ‘펀치’의 박정환이 참 많이 닮았다”고 했다.
“용기도, 정환도 아무것도 없이 태어나 더 나은 삶을 위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갈망하잖아요. 끝내 죽음을 맞는 설정도 비슷하고요. 용기의 감정선과 영화의 무게감을 그대로 가지고 드라마에 임했습니다.”
박정환은 자신을 끌어줄 타락한 권력자 이태준(조재현)을 검찰 총장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라면 딸의 양육권으로 옛 아내를 협박하는 일도 마다치 않는 인물이다. 창창한 미래가 손아귀에 잡힐 것 같았는데 뇌종양 판정을 받고는 딸이 살아갈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이태준의 숨통을 조였다.
“작품 초반에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박정환이 ‘인간극장’과 같은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것처럼, 캐릭터가 아니라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처럼 보이기 원했거든요. 그래서 카메라를 쳐다보고 ‘내 슬픔이 이 정도예요’라고 티 내지 않았죠. 이명우 감독이 ‘연기를 좀 하라’고 지적했지만 저는 내면으로 다 하고 있었어요. 편집본을 보고 나서부터는 감독님도 인정해 주시더라고요.”
‘펀치’를 관통하는 것은 이태준과 박정환의 애증이다. 두 사람은 비슷한 처지의 서로를 뼛속 깊이 공감하며 더운 우정을 나누다가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인정사정없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2003년 종영한 드라마 ‘눈사람’ 이후 꼭 십년만에 두 번째로 만난 김래원과 조재현의 호흡이 작품을 든든히 받쳤다.
“십 년 전엔 연기가 뭔지도 몰랐죠. 제가 멋모르고 연기하면 재현이 형이 다 맞춰줬을 거예요. 이번에는 주거니 받거니하며 재밌게 연기했습니다. 어떻게 연기할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계산해 오는 배우와의 연기는 참 힘들어요.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자기가 준비해 온 것을 던지는 격이죠. 그런 면에서 재현이 형은 최고의 파트너에요. 준비를 거의 안 해오거든요. 하하.”
우스갯소리를 하면서도 “재현이 형이 없었다면 박정환도 없었을 것”이라고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재현이 형이 ‘눈사람’을 찍을 때 저에 대해 ‘조용하게 연기하길래 신경도 안 썼는데 무서운 아이더라. 어느새 내 튓통수를 잡고 맞다이를 놓으려고 하더라’라고 말했다더라”라는 일화를 전하면서는 부끄러움에 한참을 머뭇거렸다.
“이제 각각의 장면이 아니라 작품 전체를 보게 됐다. 작가가 왜 이 장면을 넣었는지 이해하는 데 18년 걸렸다”는 김래원은 “드라마 ‘옥탑방 고양이’ 이후 쏟아지는 호평에 정신 못 차리고 허세 연기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지 않았으면 시간이 좀 덜 걸리지 않았을까?”라고 자문했다.
“이젠 작품을, 인생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진 것 같아요. 사람 사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요. 멜로 혹은 영웅담이 아닌, 가장 평범한, 진짜 이야기요. 작품 하나하나의 성공 여부에 일희일비하지 않겠습니다. 묵묵히 연기하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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