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오는 3월 22일은 한국무역협회 산하 무역아카데미가 설립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정부의 수출 드라이브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한 1965년 설립된 무역아카데미는 누적 양성인력만 32만명에 이르며, 현재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무역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다양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본 다면 무역인력 양성사업은 또 하나의 이권사업이었다. 이러다보니 무역아카데미가 지금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기까지는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엮였다.
◆‘수출학교’로 출범
무역대학원 설립 논의는 무협에서 비롯됐다. 무협은 1969년 5월 무역연수원 설립에 관한 논의를 거친 후 그해 6월 16일 제6차 수출진흥확대회의에 이 계획을 보고 했다. 사흘 후에는 협회 내에 무역연수원 설립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소위원회는 7월 11일에 회의를 개최해 협회 5명을 비롯해 경제과학심의회 등 모두 8명으로 무역연수원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해 설립에 관한 여러 가지 문제를 검토를 시작했고, 같은 달 24일에는 회장단 및 분과위원장 연석회의에 결과를 보고했다. 무협은 8월 21일 무역연수원 설립 준비위원회를 개최해 ‘한국무역대학원’ 설립을 발표했다.
설립위원회는 무역대학원의 입학생 요건을 정규대학 상과(경영학과), 경제학과 등 무역 경제에 관련된 학과 졸업생으로 영어회화 및 상업영어 서식 작성이 가능하고 무역실무경력 1년 이상인 자로 정했다. 또한 무역대학원은 정부와 무협에서 각각 50%씩 출연해 재단법인을 기존 대학 설치령이 아닌 한국무역대학원 설치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해서 설립키로 결정했다.
이를 토대로 무협은 무역대학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이활 무협 회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무역대학원 설립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준비 위원은 박종식(상근부회장), 강룡옥(KOTRA), 나익진(동아무역), 조군실(기원산업), 송영수(이천물산), 전택보(천우사), 한준석(경제과학심의회), 김우근(상역차관보) 등이 선임됐으며, 실무진은 임동호 조사부장이 담당했다.
◆무역대학원 설립 추진, 상공부·교육부 충돌
무협은 이어 한국무역대학원의 교육 과정을 수립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IRI 등 선진국의 사례를 참고해 외국어 부문, 지역연구 부문, 그리고 국제경제학 부문으로 크게 나눠 이를 각각 세분화된 과목으로 커리큘럼을 준비했다. 최고의 교육과정을 제공하는 만큼 각 과정에서 내로라하는 최고 권위를 지닌 국내학계의 인사를 물색했다.
그러나 문제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발생했다. 교육 문제를 책임지는 문교부에서 특별법에 의한 대학원 설립에 반대한 것이다. 특별법에 의해 대학원이 설립될 경우 문교부가 아닌 상공부 산하로 들어가기 때문에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공부는 무협이 문교부 산하의 무역대학원을 설립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무협이 하는 일은 반드시 상공부 산하에서만 움직여야 한다고 고집한 것. 문교부가 시대적 요청에 의한 교육 문제라 하더라도 문교부 산하의 현 제도하에서도 담당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세우며 무역대학원 설립 추진은 암초에 부딪쳤다.
◆성균관대에 무역대학원 설립 결론
표류를 거듭하는 가운데 문제는 엉뚱한 방향에서 해결책이 모색되고 있었다.
당시 무역대학원 설립 건이 정부의 경제과학심의위원회에서 거론된 바 있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긴밀한 관계가 있었던 박동묘 성균관대학교 총장이 이 문제를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나섬으로써 그동안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이다.
2년 여 간 미뤄진 이 문제는 1971년 2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균관대에 무역대학원을 설립하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말았다. 고위층의 신임을 가진 소위 실세들에 의해 정책 결정의 향배가 움직이던 시대였기 때문에 무협으로서는 허탈할 수밖에 없었다.
성균관대는 무역대학원의 커리큘럼을 기존 대학과 달리 무역협회에서 준비했던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교수진도 전국적으로 망라한 쟁쟁한 진용을 갖췄다. 박희범·정도영·임종철(이상 국제경제학), 고범준(국제상관습), 송정범(미주지역연구), 한동호(보험론), 홍순호(아중동지역연구), 민만식(중남미지역연구), 조관수(국제마케팅), 이세응(다국적기업론) 등이 강의를 진행했으며, 관세법, 무역거래법, 외환관리법, 신용장론 등은 현업 전문가들로 구성해 이론과 실무를 꼼꼼히 챙길 수 있는 체계적인 강의 시스템을 갖췄다. 미안한 마음에서인지 그동안의 사정을 고려해서인지 성균관대는 무협 직원이 수강 신청을 할 경우 대학원 등록금의 50%를 감면해주기도 했다.
성균관대가 무역대학원을 설립한지 2년 후부터 다른 대학도 정부에 무역대학원의 설립을 요구했다. 이후 무역대학원 수는 급격히 늘었고, 당초 목표로 했던 특수대학원으로서의 사회적 주목은 받지 못하게 되었다.
우여곡절을 겪게 되었으나 무역대학원의 설립은 우리나라 전문 무역인의 양성에 크게 기여했다. 당시에는 무역업 허가의 일반 요건으로 자본금 1억원, 신용장 내도액 30만 달러와 무역사 채용이라는 조건이 있었는데 무역대학원 1년 수료자에게는 무역사 자격을 부여했으니 엄청난 특혜를 얻게 된 것이다.
◆수출학교 이관, 무역아카데미로 재탄생
교육 사업 진출에 실패한 무협은 13년 후인 1984년 2월 22일 코트라의 ‘수출학교’ 운영업무를 이관 받아 ‘종합무역연수원’을 개원함으로써 못 다 이룬 한을 조금 풀었다. 무역연수원은 다시 1999년 4월 16일 ‘무역아카데미(WTA)’로 개편되면서 국내 유일의 종합 무역 교육 양성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무역아카데미는 연간 1만7000명에 달하는 수료생을 배출할 만큼 규모면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했고 교육 역시 분야별로 전문화 되었다. △무역업계 재직자들을 위한 무역실무·마케팅 직무교육 △일자리 미스매치를 해소하기 위한 취업연계과정 △미래 청년무역인력 양성사업 및 이러닝 콘텐츠 등 다양한 수요를 반영한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2004년 무역대학원 설립 이슈가 다시 수면위로 부상한 적이 있었다. 과거와 다른 점은 무역아카데미의 위상과 국제적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민간 교육기관에서 대학원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의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무역아카데미가 워낙 큰 조직이고 장악력이 강하다 보니 후발 교육기관의 참여가 사실상 제한 받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민간 부문 무역교육시장이 활기를 띠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역아카데미가 대학원으로 격상될 경우 이제는 대학내 무역교육과정의 침체가 가속화될 것이라는 부정적 우려도 제기되면서 더 이상 추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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