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박정민은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FILMS)가 제작한 ‘들개’(감독 김정훈) ‘신촌좀비만화-유령’(감독 류승완) 편에 출연하며 관객들에게 각인됐다. SBS ‘너희들은 포위됐다’(극본 이정선·연출 유인식) tvN ‘일리있는 사랑’ 등 드라마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19일 개봉된 ‘태양을 쏴라’(감독 김태식·제작 필름라인)은 다시 한 번 박정민의 진가를 알게 해줄 영화이다.
하지만 실상은 보스의 지시로 사람을 땅에 묻어야만 하는 상황. 그러던 찰나에 사라는 보스의 돈을 챙겨 가수로 데뷔시켜줄 제작자를 찾아가 버린다.
김태식 감독은 정형화되지 않은 카메라 워크를 뽐내며 미국의 다양한 풍광을 담아냈다. 또 몽환적이면서도 느낌 있는 앵글로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존과 첸의 심리를 잘 묘사했다.
“감독님께서 다양한 앵글을 많이 시도하셨죠. 놀라움이 있었어요. 영화에서 보여지지 않은 멋진 장면들도 있었고요. 이런 앵글에서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 할지 고민도 많았죠. 값진 경험이었습니다.”
미국은 박정민에게 있어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웅장함에 놀랐고, 뜨거운 지열, 흙 절벽에서의 연기 등은 배우들을 끈끈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스태프들과도 친해져 미국에서 고용됐던 어린 유학생들과는 아직도 연락을 주고받는다. 한 달 반 정도의 경험은 연기면에서도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됐다.
“강지환 형, 윤진서 누나, 안석환 선생님께 많이 배웠죠. 특히 안석환 선생님은 정말 치열하셨어요. 연기에 임하는 태도도 배우게 됐고요. 저도 열심히 준비한다고 했는데 선생님을 보면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만드었죠. 진서 누나는 제 얘기를 많이 들어줬어요. 진짜 누나 같았죠. 4~5시간은 거뜬하게 떠들었어요.”
박정민을 기본이 돼 있는 배우라고 얘기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캐릭터를 준비한 과정만 들어도 알 수 있다. 작품 속에서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를 연기한 그는 중국어를 연습했다. 중국 욕과 단어들, 완성본에서는 삭제 됐지만 삼촌과 중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위해 중국어로 감정선을 표현하는 연습도 병행했다.
철저한 준비성은 ‘파수꾼’ 때도 있었다. 촬영 전 감독과 4~5번 정도를 만나 얘기를 나눴다. 배역의 감정부터, 박정민의 표현을 빌리자면 쓸데없는 것들까지 시시콜콜하게 생각과 감정을 공유했다. 마지막 리딩 후 바로 촬영에 들어가면 많아야 2번째 테이크 때 오케이를 받았다. 그만큼 몰입했다.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신촌좀비만화-유령’에서 인터넷 사령카페에 빠져, 온라인으로 사랑하게 된 여우비(손수현)를 위해 승호(이다윗)와 함께 살인을 도모하는 비젠 역을 맡은 바 있다. 인터넷에 빠져 사는 ‘은따’를 연기하기 위해 직접 소품을 준비했다. 류승완 감독은 그런 박정민의 준비를 충분히 존중했다. “안경이 연기한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유쾌하게 촬영했다.
마치 연기가 천직인 것 같은 박정민은 사실 고려대학교 인문학과를 중퇴한 경력이 있다. 연기를 꿈꾸기는 중학교 때부터였는데, 그 시발점과 명문대를 뒤로 하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간 이유는 흥미로웠다.
“중학교 때까지는 공부를 조금 하는 편이었는데, 뭔가 분출을 못했다고 할까요? 그나마 영화를 좋아해 보는 게 전부였죠. 부모님이 엄하셨거든요. 답답한 가슴을 안고 강원도 별장에 놀러간 적이 있었어요. 거기서 박원상 선배님을 만나 배우란 직업을 알게 됐죠. ‘와이키키 브라더스’(감독 임순례)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했는데 처음에는 믿지 않았어요. 그냥 재미있고 매력적인 아저씨라고만 생각했는데 정말 개봉하더라고요. 그 때부터 ‘영화인’을 꿈꾸며 집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죠. 문예대전이라고 큰 대회가 있었는데 거기서 상위권에 랭크되기도 했어요. 이후 공주에 기숙사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본격적으로 영화에 파고들었죠. 읍내 비디오방에서 비디오 보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한예종을 꿈꿨어요. 그러다 한예종은 떨어지고 고려대 인문학부에 ‘추가 모집’ 꼴찌로 입학했어요. 학교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지금 뭐하고 있나’ 싶기도 했죠. 예술의 전당 영상자료원을 수시로 찾아 영화만 봤던 것 같아요. 그러다 한예종에 다시 시험을 봐 붙었죠. 그리고 박원상 선배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박원상의 배려로 연습실을 구경하게 된 박정민은 매일 연습실 문턱을 드나들며 자연스레 스태프가 됐고 학교도 등한시하게 됐다. 이듬해 군대에 다녀와서도 다시 극단을 찾아갔다. 이때 연기를 위해 한예종 영상원 영화과에서 연극원 연기과로 전과를 했다. 전과 후 ‘파수꾼’으로 반강제 데뷔하게 됐다. 졸업영화라 어쩔 수 없이 출연한 것인데 천운이라면 천운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지난해 2월 첫 선을 보인 고(故) 윤영선 극작가의 초기희곡 ‘G코드의 탈출’이다. 1년 전 헤어졌던 남녀가 허름한 여관방에서 재회한다는 설정의 2인극인 ‘G코드의 탈출’에서 김보나와 주인공을 맡은 박정민. 그가 해당 연극에 사비를 투자했다는 점이다.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오르지 못해도 꾸준하게 공연을 이어가겠다는 계획이다.
연기에 관한 박정민의 행보가 어디까지 이어질지 관심이 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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