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도 다 묻었지?” 남편의 말에 아내는 황급히 말한다. “내가 할게, 내가 할게.” 아내는 절박하게 샤워기를 잡지만 수압을 이기지 못한다. 아내가 놓쳐버린 샤워기에서 물이 사방으로 튀어 남편도 아내도 홀딱 젖었다. 사타구니까지 남편에게 맡긴 아내는 남편의 도움으로 간신이 일어서더니 울먹거린다. “여보…나 또…….” 남편은 굳은 얼굴로 한숨을 삼키며 “괜찮아, 괜찮아. 엉덩이 좀 들어봐”. 여자는 남편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여보 미안해. 여보 미안해” 하며 울부짖는다. 앙상하게 말라버린 몸에서 쥐어짜 낸 동물 같은 울음이 극장 안을 덮치고 객석에는 무거운 적막감이 흐른다.
임권택 감독의 102번째 영화 ‘화장’을 보고 일주일 만에 서울 사간동에 위치한 카페에서 주연배우 김호정을 만났다. 그가 “유독 반갑게 맞아 주시네요”라고 말할 만큼 기자는 유난스러운 인사를 건넸다. 짧지 않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선명한 영화의 잔상 때문이었다. 김호정은 뇌종양으로 죽어가는 아내를 너무나 사실감 있게 연기했다. 메말랐던 눈에 생기가 돌고 푹 꺼져 있던 볼이 보기 좋게 차오른 김호정을 보자니 남편의 사랑 한번 못 받고 죽은 아내가 살아 돌아온 것 같다.
“영화를 봐 준 관객의 반응이 좋았다면 다행”이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는 단편적이고 자극적인 보도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 있다고 솔직히 말했다. “노출은 꼭 필요한 신이라 자연스레 찍었는데 ‘전라 노출’이라는 타이틀로 앞뒤 문맥 없이 너무 자극적으로만 다뤄진다”며 “나를 믿고 선택해 준 임권택 감독과 깊은 배려를 보여 준 안성기 선배는 물론,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던 모든 스태프에게 죄송하다.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과 함께 만든 장면”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원래는 바스트 샷(인물의 머리부터 가슴 부분까지를 촬영)으로 하기로 한 장면이에요. 리허설부터 본 촬영까지 4번을 찍고 OK를 받았죠. 그런데 임 감독님이 심각한 얼굴로 안 선배님과 저를 부르시더니 한참을 말씀하시더라고요. 온몸에 진이 빠진 상태라 무슨 말씀인지도 모르고 고개만 끄덕였더니 안성기 선배님이 ‘너 정말 괜찮겠어?’라고 다시 묻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임 감독님이 전신 샷으로 찍자고 말씀하셨다는 걸요.”
계획에 없던 전라 노출을 부탁받았을 때 김호정이 고민한 이유는 예상 밖이었다. “필요하다면 해야죠. 제가 진짜 걱정스러웠던 것은 ‘극한의 감정을 또 다시 연기할 수 있느냐’였어요. 정말 온몸에 힘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거든요. 그 순간 제가 좋아하는 배우를 떠올렸어요. 송강호(영화 '박쥐')와 전도연(영화 '해피엔드')이요. ‘그들도 이렇게 시험에 들만 한 상황에서 그렇게 훌륭한 결과물을 뽑아냈겠지’ 생각하며 추스렸습니다. 근데 사실 앞서 촬영한 바스트 샷이 마음에 쏙 들게 나왔거든요, 하하”
천생 배우다. 김호정은 “이미 극도로 살을 빼 놓은 상태여서 더 이상의 다이어트가 쉽지 않았다. 모니터를 보니 허벅지 살이 약간 남았더라. 아쉬웠다”면서 “그날 촬영이 어찌나 힘들었던지 그렇게 안 빠지던 살이 2kg 나 빠졌다. ‘다시 찍자고 할까?’하는 마음이 잠깐 들었다”며 웃어 보였다. 존경스러움이 절로 이는 웃음이었다.
몸도 주고, 마음도 주고, 심지어 돈까지 줬던 남편에게 진정한 사랑 한번 받지 못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허우적대는 아내는 결핍의 결정체다. 배우 김호정은 체중감량, 삭발과 같은 외형적 모습은 물론이고, 병마로 스러져가는 내면까지 꼼꼼하게 연기해 냈다.
“2000년대에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했어요. 회복하긴 했지만 나를 지배했던 죽음의 두려움을 다시 떠올리는 것이 너무 두려워 처음에 출연을 거절했었죠. 그런데 ‘내 삶을 투영시켜 연기하는 배우가 되겠다’는 젊은 날의 다짐이 떠오르더라고요. 두려움 때문에 여기서 안주하면 말만 하는 배우가 되는 거잖아요. 또 거장 임권택 감독님의 부름이 저를 설레게 했고요.”
김호정은 “체중 절감을 위해 현미밥 요~만큼, 두부 요~만큼, 아몬드 세 알만 먹고 버텼어요. 고기가 아주 먹고 싶을 때는 지방이 없는 부위로 골라 딱 세 점 구워 먹었죠”라고 할 때 엄지를 검지에 대고 ‘요~만큼’을 말했고, 허공에 점을 찍듯 아몬드 세 알을 그렸고,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만들어 고기 굽는 시늉을 했다. 생명력이 느껴졌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목표를 상실했어요. 계속 마음이 차지 않아 우울했죠. 몸도 아팠고요. 그러고 나니까 연기가 절실해졌어요. ‘화장’을 촬영하면서 몸이 가벼워지고 좋아진 느낌이에요. 영화에서는 죽지만 저에게 새롭게 신인 같은 마음을 주고 희망을 주는 작품이 됐어요. 요즘에는 매사에 감사하며 지내고 있어요. 열심히 해서 좋은 연기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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