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베이징특파원 조용성 기자 = "나는 중국인이고, 우리의 고향은 중국 광평이니, 후대들이 반드시 이를 기억하도록 하라." 조선시대 전라도 병마절도사를 지냈던 전득우는 아버지, 할아버지가 임종전 자신에게 들려줬던 말 그대로를 그 역시 죽기직전 후손들에 유언으로 남겼다.
378년전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광평 전(田)씨 문중이 중국 언론에 의해 집중 조명됐다. 환구시보 산하 잡지인 환구인물은 두페이지에 걸쳐 광평전씨를 소개했다.
매체에 따르면 광평전씨는 한국에 100~200명가량 존재하며, 이들은 한국 육군 중장, 고려해운 경영자, 단국대학교 총장 등을 배출했다. 이들은 설날에 춘롄(春聯)을 대문에 붙이고, 중국식 춘제음식을 먹으며, 정월대보름에는 등을 다는 등 중국인의 생활습관을 유지해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공을 세워 벼슬을 받았으며, 중국인과 결혼해 4남3녀를 낳았다. 노년이 된 이후 그는 항상 자녀손자들에게 "우리의 고향은 중국 광평부(廣平府) 펑정현이다"며 "세상이 평화로워지면 반드시 돌아가야 하며, 그때까지 우리는 명절이 되면 서해바다 해변으로 나가 중국을 향해 절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아들인 전회일 역시 조선의 신하가 됐으며, 사신 자격으로 중국을 방문하여, 아버지의 고향인 광평부를 찾아가 종친들에게 이미 사망한 아버지의 초상화와 편지들을 전했다. 중국의 종친들은 그제서야 전호겸의 소식을 알게됐고, 서로 교류하게 됐다. 전라도병마절도사를 지낸 전득우 역시 전호겸의 후손이다.
조선후기 중국 펑정현의 전씨일가는 가세가 기운 나머지 한국으로의 집단이주를 계획했었지만 번번이 좌절됐었다. 한국의 전씨일가들은 일제강점시절 중국의 문중에 편지를 보내 "일본정권은 잔인하며, 중국으로 이주하고 싶다"는 뜻을 피력했으나, 중국의 일족 역시 힘든 삶을 살기는 마찬가지였으며, 상봉은 이뤄지지 못했다.
이후 한국전쟁과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이들은 연락이 끊겼으며, 한중수교가 이뤄진후 광평전씨 일가들은 중국의 종친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당시 고려해운 대표이사 사장이던 전문준은 중국주재원에게 의뢰하여 종친을 찾도록 백방으로 노력했고, 결국 2004년 상봉에 성공했다. 이후 한국과 중국의 광평전씨들은 지속적으로 교류하고 지낸다고 한다. 잡지의 기사는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찾았으며, 영원히 이를 잊지 않을 것"이라는 한국 광평전씨 종친회 회장의 말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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