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자로서 오랜 시간 활동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소비되지 않는 배우’라는 것이다. 주·조연을 맡은 66편의 드라마, 25편의 영화에 출연한 윤여정은 그 많은 출연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배역을 고사해 왔다. 언제나 새로운 모습을 보여 주려 노력하는 천생 배우 윤여정을 지난달 30일 서울 팔판동 카페에서 만났다.
윤여정은 9일 개봉하는 영화 ‘장수상회’(감독 강제규·제작 빅픽쳐·CJ엔터테인먼트)에서 장수마트 모범 직원 '성칠'(박근형)의 마음을 흔드는 '임금님' 역을 맡아 열연을 펼쳤다. 이름도 예쁜 금님 씨, 출연 계기부터 물었다. 사실 스케줄 상 ‘장수상회’ 출연은 어려웠고 다른 배우를 추천하기도 했다. “할 듯 말 듯하는 행동을 제일 싫어한다”는 윤여정은 “(출연 여부를) 빨리 알려주는 편이다. 그래도 같이 찍자고 해서, 8월까지 기다려줄 수 있느냐고 했더니 된다고 하더라.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고 회상했다.
“저는 이제 (겹치기 없이) 순서대로 일하는 나이가 됐죠. 언젠가 ‘장수상회’가 들어온 적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못할 상황이라 고사를 했어요. 드라마 출연이랑 겹쳤죠. 몇 달 뒤에 다시 연락이 와서 이건 내 것인가 보다 하면서 출연하기로 했어요. 제 나이에는 욕심을 버리는 게 맞죠. 편하게 정리하는 단계라 역할에 대한 큰 욕심도 없어요. 인연이 되면 하는 것이고, 그걸 알 수 있는 나이가 돼 편안하죠.”
“지난 번에 한 역할은 안 하려고 해요. TV는 속성상 '국화빵'처럼 찍어내야 하니까 똑같은 역할이 오는 게 이치죠. 그건 제가 피하려고 노력했어요. 없는 돈에도 애썼어요(웃음). 얼마 전 손석희의 ‘뉴스룸’에 출연할 때 손석희 씨가 물어보더라고요. 오랜 연기 비결을요. 팔자인가? 그때 ‘김태희 같은 미녀도 아닌데’라고 아픈 곳을 찌르더라고요. 제가 연기를 시작할 때는 진짜 미남미녀가 아니면 연기를 못하던 시절이었어요. 더빙은 성우가 하고, 연기는 감독이 시키는 대로 했으니까요. 어떤 의미로는 기적이었죠. 김기영 감독님이 저를 많이 놀렸어요. ‘미스 윤은 모든 사람에게 배우가 될 수 있는 용기를 줬어’라고요. 제가 미녀가 아니라는 얘기 아니겠어요(웃음)? 손석희 씨하고 얘기하다 보니 ‘열등의식이 있지 않았나’ 생각했어요. 목소리도 안 예뻐 넘어야할 게 많았죠.”
상대배우 박근형과는 ‘장희빈’(1971), ‘그대 목소리’(1995) 등에서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또 하나의 변신 지점이다. 금님 씨와 성철의 로맨스, 돌아보니 배우 윤여정의 향긋한 멜로는 기억에 없다.
“당시 박근형 선생님은 저보다 선배셨고, 무대에서 날리던 연극배우였어요. 연기를 정말 잘하셨죠. 저는 아르바이트로 연기를 하려다 배우가 된 신인이었고요. 처음에는 7년 선배였지만 지금은 같이 늙어가잖아요. 흥망성쇠를 서로 바라보며 같이 연기를 해 왔으니 지금은 편안하게 보죠.”
과거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며 잠시 연예계를 은퇴했던 윤여정은 “멜로를 해보기 전에 배우를 쉬었던 것 같다”며 “사실 저는 멜로에 관심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주변에서 하도 ‘멜로, 멜로’하니까 지겹다고까지 했어요. 얼마 전에 ‘미생’에서 장그래(임시완)와 오 차장(이성민)의 끔찍한 사랑을 보면서 정말 많이 생각했어요. 이 모 작가한테 ‘멜로 좀 그만 써라. 장그래와 오 차장처럼 사랑하면서도 어떻게 해 주지 못하는 선후배의 사랑을 보면서도 눈물을 흘리지 않느냐. 남녀의 멜로 좀 그만 쓰라’고요(웃음).”
나영석 PD의 tvN 예능 ‘꽃보다 누나’에 출연하면서 연기 외적인 매력도 발산한 윤여정은 박지은 작가와 ‘개그콘서트’의 서수민 PD가 손발을 맞출 드라마 ‘프로듀사’에도 출연한다.
‘프로듀사’는 예능국 안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에피소드를 그린 작품으로 차태현, 공효진, 김수현, 아이유, 박혁권, 나영희, 예지원, 김종국, 조윤희, 박희본, 이채은, 강신철, 김희찬 등 쟁쟁한 스타들의 출연이 확정됐다.
끊임없이 도전하고 연기하는 배우 윤여정. 쟁쟁한 후배들 사이에서 그가 보여 줄 또 다른 모습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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