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래사냥’, ‘남부군’, ‘태백산맥’, ‘투캅스’, ‘야시’,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실미도’를 지나 ‘신의 한 수’까지. 다섯 살 영화 '황혼열차'의 아역배우로 시작해 따라가는 것이 벅찰 정도인 그의 필모그래피는 한시도 잠잠하지 않다. 곡예 하듯 널뛰는 감정을 지닌 인물들은 노장을 노쇠하지 않게 했다.
영화 ‘화장’(감독 임권택·제작 명필름) 개봉일인 9일 아주경제는 배우 안성기와 만났다. 친숙하면서도, 멀게 느껴지는 데뷔 58년 차 관록의 배우는 여전히 연기에 대한 고민을 놓지 않고 있었다.
“‘화장’은 굉장히 사실적인 영화예요. 예컨대 ‘신의 한 수’에서 연기했던 주님은 만들어진 인물이죠. 하지만 ('화장'의) 오상무는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에요. 이 시대의 중년의 표상, 자화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중년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죠.”
“오상무는 많은 중년이 가진 지병을 앓고 있고, 같은 무게를 느끼고 있어요. 정년에 쫓기고, 일의 스트레스를 받는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죠. 극히 사실적인 상황을 마음에 담고 있는 인물이기에 사실적인 느낌을 자연스럽게 표출해야 했어요. 자칫하면 그 마음이 깨질까 봐 유지하는 것에 몰두했죠.”
영화를 촬영하는 내내 “힘들었다”고 했다. “오상무와 같은 상황”을 내적으로 느끼면서 “호흡이 깨지지 않도록” 했다. 지방촬영이 잦았던 만큼 홀로 오상무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간신히 깨어날 수 있었는데 시사회니 개봉이니 해서 다시 보게 됐어요. 어휴, 영화를 다시 보게 되니까 또 힘들더라고요(웃음).”
솔직히, 조금 놀랐다. 58년. 그 세월을 가늠하는 것이 의미 없을 정도의 경력을 지닌 관록의 배우에게 ‘어려운’ 연기가 있다는 것이. 그리고 아직도 자신의 연기에 대해 고민하고 잘하길 바란다는 사실이 말이다.
“맞아요. 연기를 잘하고 싶죠. 많은 역할을 하고 싶고요. 그럼에도 전 아버지 역할을 하는 걸 못 견딜 것 같아요. 그냥 신문을 펼쳐 들고 ‘어 왔니?’하고 묻는 그런 역할들 있잖아요. 그런 것보다는 에너지 있는 일을 하고 싶은 거죠. 나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관객들에게 배우의 에너지를 느끼게 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작품이었다. 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만큼, 사건보다는 인물의 내면에 집중해야 했다. 오상무가 바라보는 시선과 내면의 갈등, 미세한 움직임들을 끌어내야 했기에 안성기는 더욱 예민하게 신경을 기울였다.
“아내에게 포도주를 선물 받는 신이 있어요. 선물을 열어 보고 오열하는 신이었는데, 영화를 보니 편집이 됐더라고요. 그 뒤에 사진을 보고 폭발하는 신이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아요, 한 번 눌러주듯이 말이에요. 포도주는 아내가 그동안 자신 때문에 힘들었던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부탁 같았어요. 그걸 보는 오상무의 마음 또한 마찬가지였죠.”
늘 죽음의 냄새를 맡아 왔던 오상무는 싱그러운 젊음의 향기에 취해 버렸다. 오상무는 생기를 찾아 갔고, 아내는 그의 변화를 감지했다. 일련의 과정들은 세밀하게 그려졌고, 세 배우들의 흠 잡을 데 없는 연기력으로 채워졌다. 그 고통스러운 순간에 대해 대화를 나누던 도중, 안성기에게 “아내가 정말 안쓰럽게 느껴졌던 순간”을 물었다.
“욕실 신이죠. 얘기를 안 할 수 없죠. 그 장면이 없었다면 ‘화장’이라는 영화가 이렇게 힘을 받을 수 없었을 거예요. 이 작품이 승화되는 모습을 볼 수 있죠. 그건 김호정 씨의 덕이 커요. 홀몸으로 정말 열심히 해 줬어요.”
안성기는 그 신에 대해, 그리고 김호정에 대해 몇 번이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숭고함마저 깃든, 욕실 신은 처절하다 싶을 정도로 사실적이고 괴로웠다.
“욕실 신은 사실 보기 흉할 수 있는 장면이잖아요. 분비물을 다 쏟아 내고 괴로워하는 걸 그대로 표현하는데, 그게 또 아름답게 느껴지는 거죠. 그건 김호정 씨가 숨기지 않고 모든 걸 보여줬기 때문에 관객과 걸림이 없었던 것으로 생각돼요. 장면을 다 자르고, 끊어서 갔다면 이 정도로 감정몰입,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연기 말고도, 어려운 것이 있었다. 바로 ‘여배우’들과 함께한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라디오스타’, ‘실미도’, ‘신의 한 수’ 등 주로 남자 배우들과 호흡을 맞춰 왔던 안성기였기에 두 여배우가 낯설게 느껴졌다.
“여자들이랑 하는 게 더 힘들어(웃음). 그동안에 제가 멜로나 사랑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여배우를 만날 일이 없었거든요. 젊을 때부터 그랬어요. 어색해, 그런 게. 그런데 이번엔 어색함을 떠나서 인간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연기에 있어서는 그리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도 ‘라디오 스타’ 같은 게 더 재밌긴 하죠. 그런 영화를 할 땐 출연료를 받고 잘 노는 기분이 들거든요.”
재미는 덜했어도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던 시간. 안성기의 ‘시간’은 늘 고되고 집요했지만, 그만큼 관객들에게는 신뢰감을 더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하며 “늘 40대 같은 인상이다”라고 말을 건네자, 그는 커피 광고에나 나올 법한 미소를 짓는다.
“물리적으로 나이가 먹는 것, 변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은 줄 수 있죠. 그러기 위해서 늘 노력해요. 잘살아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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