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TV프로그램을 통해 전 국민의 ‘삼둥이’가 된 영화배우 송일국씨의 세쌍둥이 대한·민국·만세의 애교는 저출산 기조 심화 속에 자식에 대한 무한애정을 전달해 큰 화제가 되고 있다.
그런데, 원조 세 쌍둥이 스타는 32년 전에 태어나 지금은 한국산업을 키우는 든든한 사회인으로 성장했다. 현대중공업에서 반건조 시추선 건조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장호태 드릴십 의장부 기사(32)과 그의 두 형들이 주인공이다. 장 기사의 형제는 자연임신으로는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태어난다는 일란성 세쌍둥이다. 당시 세 쌍둥이가 탄생했을 때 지역 일간지에 실린 것은 물론이고, 대통령의 축하카드까지 받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장 기사 형제들은 모두 ‘현대’ 울타리에서 함께 근무하고 있다. 큰형인 장호현 씨는 현대엔지니어링에 근무하며 현재 신율전관 신축공사를 하고 있으며, 둘째 장호필 씨는 협력회사인 하이에어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세 쌍둥이가 함께 자리를 함께하니 누가 형이고 아우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똑같았다.
1984년 12월, 분만실로 들어간 어머니가 제왕절개로 쌍둥이를 무사히 낳고 봉합수술을 하려던 순간, 갑자기 뱃속에서 쑥 나온 발 하나에 의사와 간호사들이 깜짝 놀랐다. 임신 기간 동안 쌍둥이인줄로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 발을 조금만 늦게 내밀었어도 장 기사는 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몸무게 1.4kg로 태어난 세 쌍둥이는 근 8개월이나 인큐베이터 신세를 져야 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이었던 엄청난 병원비로 인해 젊은 신혼부부는 순식간에 가난한 아버지, 어머니가 됐다고. 지금 삼형제의 나이였던 아버지는 시청으로, 구청으로 관공서를 찾아다니며 도움을 요청했고, 다행히 부산시청에서 병원비 일부를 지원해줬으며, 이들의 사연이 알려지면서 유아 용품 회사에서도 다양한 후원을 해줬다.
당시에는 보기 드문 세 쌍둥이였기에 이들은 유년시절 가족과 동네 이웃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아기였을 때 목욕탕을 한 번 가려면 어른 다섯 명은 같이 가야 했고, 품앗이 하듯 동네 이모들이 총 출동했다. 덕분에 온 동네 어른들이 보호자가 됐다.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서는 지금도 ‘세쌍둥이 집’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아버지가 선박기자재 납품업체를 운영하셨지만 영세업체이다 보니 집안 형편은 늘 어려웠다. 그래서 이들은 변변한 학원도 다녀보지 못했다. 가끔 세쌍둥이라는 광고 효과를 노리고 할인을 해주는 곳도 있었지만 지속적으로 이뤄지지는 못했단다.
세 쌍둥이들이 아쉬움으로 간직하고 있는 건 태권도를 배우고 싶었는데, 배우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무도 학원에는 대련(對鍊)이라는 것이 있는데, 만약 다른 아이와 싸움이 생기면 세 명이 덤빌까 우려된다며 학원에서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삼형제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당시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로 인해 집안 형편은 더 어려워졌다. 다행히 세 쌍둥이가 다니면 수업료와 급식비 전액을 무료로 해주겠다고 제안한 학교가 있어 다 같이 공업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이들은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해 돈을 모았고, 모두가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생활비와 학비는 아르바이트와 장학금으로 스스로 마련한 효자 삼형제들이다.
삼형제는 어려웠던 성장 과정을 한 번도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니까, 힘든 일도 서로 바라보며 지내오다 보니 지금은 다 지나간 추억이 됐다고 한다.
이들은 “쌍둥이라 특별히 통하는 교감(交感)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그런건 없는 거 같았다. 우리는 그냥 평범한 형제 같다. 좀 사이좋은 형제?”라면서 “단, 서로 집 같은 느낌은 있었다. 마음이 불안하다가도 같이 있으면 편안해진다. 혼자였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5개국어 글로벌 경제신문' 아주경제.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