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시간 이상 계속된 회담에서는 중국이 밀어붙이고 있는 남중국해 스프래틀리 군도(중국명 난사·南沙 군도)에서의 인공섬 건설이 가장 핵심적인 의제였다. 왕이의 발언은 “우리의 입장은 바뀔 게 없으니 싸움 걸 생각 말라”는 뜻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예견되고도 남았다. 케리 방중 전에 양국은 인공섬 건설을 놓고 이미 전초전을 벌였기 때문이다.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지난 13일 상원 외교위 청문회에서 “주권은 제조할 수 없는 것”이라고 중국에 직격탄을 날렸다. 더욱이 미국이 난사군도 내 인공섬으로부터 12해리 이내에 군함과 군용기를 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중국은 크게 반발했다.
케리·왕이 회담에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건설 중인) 초소나 군사용 활주로가 아니라 ‘스마트 외교’다.” (케리) “영토 주권을 지키고자 하는 결의는 바위처럼 굳건하며 흔들릴 수 없는 것.” (왕이)
“미국은 마침내 중국의 속임수에 넘어갈 것이다. 많은 서방국가들은 세계 평화를 바라지만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당한 치욕을 되갚아주려고 한다. 최선은 미국이 중국과 거리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ID, 사우스 퍼시픽 맨)
중국은 관영 매체를 통해 반미(反美) 여론 몰이에 나섰다. 국영 CCTV 시사 프로그램에 나온 전문가들은 하나 같이 “당사국도 아닌 미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끼어든 것은 아무런 정당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아시아 리밸런싱’ 등 그 배경을 분석하는 모습이었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남해(南海)’라고 부른다. 공해가 아니라 자신의 근해(近海)라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중국 어민들이 이 바다에서 어로 작업을 통해 생계를 유지했다고 주장한다.
남중국해는 이미 ‘잠재적인 화약고’가 돼버렸다. 영국 권위지 더 타임스는 22일자에서 “미·중이 섬 문제로 전쟁을 벌일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도했다. 조지 소로스는 지난 19일 세계은행 콘퍼런스에서 “미국이 중국에 중대 양보를 하지 않으면 제3차 대전이 일어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군사전문가들은 이에 미·중간 남중국해 갈등이 향후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진단하느라 바쁘다. 이들이 제시하는 시나리오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다. 우발적인 무력 충돌, 오래 끄는 소규모 접전, 협력적인 관계 유지가 그것이다.
최악의 상황인 무력 충돌은 미국이 군사력을 인공섬 12해리 이내로 전개할 때 초래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가능성은 낮지만 중국군이 대함 미사일을 미 군함에 발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중국군 지휘관들의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이유로 꼽기도 한다.
다음으로 중국 측은 어선이나 해안 경비대 함정을 동원해 미 군함을 방해할 수 있다. 미 군함은 이들 배에 공격을 가할 수 있으나 상징적인 조치에 그칠 것이란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협력 관계 유지’ 시나리오는 양국이 여전히 손을 맞잡아야 할 분야가 많다는 데 근거하고 있다.
하지만 신흥강국이 패권국에 도전할 때는 전쟁을 피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은 아편전쟁 200주년(2040년)과 신중국 건설 100주년(2049년)이 가까워질수록 열강에 짓밟혔던 굴욕의 역사를 되씹을 것이다.
중국 국방부가 26일 발표한 국방백서에서 ‘중국의 6대 주요 위협’으로 ‘역외 국가들의 남중국해 관여’를 명시하고 전략 개념을 적극적 방어로 수정한 것은 이러한 기류의 단초를 보여준다.
이런 과정에서 언젠가 ‘남중국해 전쟁’이 현실화 된다면? 미·일과 중·러 두 거대 세력이 충돌하면서 한반도가 또 다시 전란에 휩싸일 수도 있다. 우리는 구한말의 비극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을 준비가 돼 있는가. 군주론을 쓴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말은 처절하다. “스스로를 지키려 하지 않는 자, 그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
(아주경제 국제담당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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