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 전공인 권덕영 부산외대 교수는 오는 5일 오후 한국학중앙연구원 비교한국학연구소 세미나에서 발표할 논문 '당 구성궁의 김인문 친필 서적(書跡)'이라는 논문을 통해 이런 사실을 보고한다고 밝혔다.
권 교수에 따르면 수·당 시대 황제의 여름 별장 중 하나인 구성궁 터에 남은 당나라 때 비석 중 하나로 영휘 5년(654) 당 고종이 만년궁(萬年宮), 곧 구성궁에 행차했을 때 지은 '만년궁명비'(萬年宮銘碑)라는 비석 뒷면에 새긴 글인 음기(陰記)에서 김인문이 직접 쓴 글씨가 확인됐다. 만년궁은 지금의 산시성(陝西省) 바오지(寶鷄) 시 톈타이 산(天台山)에 있다.
이 비석 음기에서 김인문은 '좌령군장군 신 김인문'(左領軍將軍臣金仁問)이라는 관직과 이름으로 등장한다.
이 중에서 '김인문'에 해당하는 부분에서 가운데 글자인 '仁'만이 확연해 종래 중국 학자들은 '薛仁貴'(설인귀)나 '劉仁軌'(유인궤), 혹은 '劉仁願'(유인원)으로 판독했다. 세 인물 모두 신라의 삼국통일, 혹은 이후 전개된 신라-당 전투에서 자주 등장하는 당나라 장수들이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학계 일부에서 이를 '김인문'으로 판독하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다. 권 교수는 세 번의 현장 답사 결과와 기존 중국학계 주장을 검토한 결과 첫 글자는 '金'임이 확실하며, 이름 마지막 글자 역시 '問'임에 틀림없다고 결론내렸다. 실제 탁본이나 실물을 보아도 '金'이라는 글자는 확연하며, '問' 또한 전체를 알아보기 힘들지만 問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이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에게서 낳은 아들 중 한 명으로 격동의 역사에서 당나라에는 모두 7번이나 들어가 외교 활동을 펼치다 결국 죽음도 당나라 서울 장안에서 맞이했다. 그의 일생은 삼국사기에 열전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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