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일 아주경제는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감독 장건재·제작 모슈쿠라 나라국제영화제)의 장건재 감독을 만났다. 전작 ‘회오리 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를 지나 ‘한여름의 판타지아’(2015)로 귀결되는 간결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은 어딘지, 장건재 감독과도 닮아있는 듯했다.
“개봉하고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실 감독으로서는 영화 작업을 끝내면 할 일은 다 한 건데…. 이번 작품은 달랐어요. 관객들에게 어떻게 이 영화를 배달할 수 있을지 고민을 좀 했죠.”
일본 나라국제영화제의 제작지원 프로젝트 ‘NARAtive’를 통해 완성된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나라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인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흡사 PPL처럼” 고조시에서 촬영하고 일본 스태프 및 배우와의 협업, 고조시의 불꽃놀이 축제 장면을 영화에 등장시키는 것이 조건이 됐다. 1억 원의 예산을 프로덕션 비용으로 지원받았고 촬영 6개월 전 장건재 감독은 3박4일 일정으로 고조시를 방문했다.
“준비 시간이 충분히 필요했는데 사정이 있어서 일찍 촬영하게 됐어요. 어떻게 보면 준비가 안 된 부분이 많은 영화였죠. 촬영 당시에는 1부의 이야기만 가지고 간 거였어요. 실제 조사하고 취재했던 이야기들이요. 인터뷰하면서 만났던 분들의 이야기를 꾸렸는데 3일 정도 쉬면서 2부를 그날그날, 매일 만들어가게 된 거죠.”
영화는 일본의 지방 소도시 나라현 고조시를 배경으로 영화감독 태훈(임형욱)과 조감독 미정(김새벽), 그리고 고조시에 정착한 일본 청년 유스케와 홀로 여행을 온 혜정(김새벽)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를 엮은 작품이다. 총 2부로 나뉘는 영화에 대해 “챕터를 나눈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싶었다”고 말한다.
“데칼코마니처럼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 2개의 에피소드를 만들려고 했어요. 결국 반영되지는 못했지만요. 1부는 감독의 영화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 담겨있고, 2부는 이 감독이 영화를 만든다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면 좋겠다는 것들이 펼쳐지죠. 실제로 2부 촬영할 땐 태훈처럼 사람들과 공간의 잔상을 토대로 대략적인 얼개만 가지고 찍어나갔어요.”
‘대략적인 얼개’만 가지고 영화를 찍어나간다는 것은 장건재 감독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가 할 수 있는 걸 만들어보자”는 다짐으로 배우들을 설득해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그는 “어떻게든 영화는 만들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감독이 포기하지 않으면 영화는 어떻게든 만들어진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쉽게 포기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또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스태프, 배우들과 함께 만들어지는 거니까 저에 대한 믿음 보다는 완성될 것에 대한 믿음이 있었던 거죠.”
영화의 재료는 이미 다 준비된 셈이었다. 고조시에서 촬영해야 했고, 일본 배우와 스태프의 협업과 불꽃놀이의 순간을 담아내야 했으니 말이다. “그 재료들을 어떻게 요리하느냐가 관건이었겠다”는 말에 장 감독은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재료였다”고 거들었다.
“반드시 써야 하는 부분이었고요. PPL이라고 봐도 무방하죠(웃음). 그런 제약을 받으면 사실 만드는 사람 입장에서는 거부감이 들기도 하잖아요. 제 세 번째 영화였고 그 공간 안에서 세계를 펼쳐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공간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마음, 인물 사이의 감정을 보려고 노력했죠. 어떻게 보면 그것에만 집중했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다 보면 공간의 무드, 백그라운드의 히스토리도 자연스럽게 묻어날 수 있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죠.”
한정된 재료 안에서 장건재 감독은 두 가지 이야기를 내놓았다. 태훈과 미정이 만나는 고조시 마을 사람들의 호흡과 혜정과 유스케의 만남은 다른 이야기처럼, 혹은 한 이야기처럼 변주됐다. 흥미로운 것은 배우들과 실제 마을사람들의 조화, 그리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다.
장건재 감독은 1부에 등장하는 인터뷰 신에 대해 “실제 마을 사람들의 인터뷰”라고 말했다. 겨울에 만났던 마을사람들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여름에 다시 한 번 인터뷰를 요청했다. 주리 카페, 30년 넘도록 모닝세트를 먹으러 가는 단골손님, 시노하라의 노모까지. 장건재 감독은 그들의 기억을 고스란히 ‘여름’에 녹여냈다.
“6개월 만에 마을 분들을 다시 만났죠. 다시 한 번 인터뷰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오히려 두 번째 만나서 더 편안한 느낌을 받았어요. 영화에는 1~2분 정도 담겨있지만 실제로는 인터뷰가 굉장히 길어요.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마을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조화는 순전히 “배우들의 몫”이었다. 장 감독 역시 “증언과 연기, 연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기가 힘들었을 것”이라며 “정해진 것이 없으니 배우들이 직접 다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세세하게 디렉션을 주지 않은 장면이 많았어요. 순서대로 찍었고, 오늘 찍었던 감정과 상태를 그대로 가지고 가야 하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 무엇을 찍었느냐’가 정말 중요했었죠. 배우들이 그런 형식의 작업을 즐겼다고 생각해요.”
배우들과 스태프, 장건재 감독이 만들어낸 즉흥곡. 그 견고하고 단단한 ‘합주’는 배우들과 스태프에 대한 장건재 감독의 신뢰와도 같았다. “한쪽에서 믿어줄수록 점점 더 커지는 믿음처럼” 의지하고 도와가며 신뢰감을 형성했다.
“이와세 료는 제 오랜 친구에요. 오랫동안 만나서 술도 많이 먹고, 이야기도 많이 나눈 사이죠. 우리가 주로 하는 건 영화 얘기예요. 어떤 영화가 나쁜지, 좋은지, 어떤 배우가 훌륭한지. 서로에 대한 취향을 알고 있어서 말하지 않아도 대충 감은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이와세 료의 매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장건재 감독은 그를 순박하고 사랑스러운 청년 유스케로 완성했다. “자칫하면 추근덕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는” 신들도 “이와세 료이기 때문에 사랑스럽게” 표현됐다.
“새벽 씨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지난 영화에서는 강한 캐릭터들을 맡았는데, 실제 만나보니까 제가 본 예쁜 점들이 보이더라고요. 이걸 잘 담아내면 매력적인 인물로 탄생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아름답게 찍어버리겠다고 다짐했죠. 실제로도 정말 예쁘게 나왔고요. 많은 스태프가 새벽 씨를 사랑했고, 그런 기운들이 영화를 아름답게 만들었어요.”
배우들의 숨소리, 고조시의 온도, 인물들 간의 움직임으로 완성된 ‘한여름의 판타지아’. 즉흥적으로 채워진 디테일들인 만큼 순간의 선택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장건재 감독은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업했다”고 말했다.
“대사의 토씨 하나라도 다르게 말할 수 없도록 현장을 장악한 게 아니라 많은 가능성을 열어두고 작업했어요. ‘잠 못 드는 밤’때부터 그런 작업 형태가 생겼는데 이번엔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구현하는 식의 방식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을 두는 거죠. 가능성과 여지를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간 거니까요. 한 번도 합주해보지 않은 배우들이 모여서 리듬을 타기 시작하면서 잼 같은 연주가 만들어진 거예요. 모든 신, 하나하나가 생명체처럼 꿈틀대는 것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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