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국가와 사회 그리고 부처님의 은혜를 입은 제가 그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한 결과, 본인 명의의 모든 사유재산을 낙후한 한국 불교의 중흥사업을 위해 내놓기로 하였습니다.”
1975년 7월 10일, 동국제강 창업주 대원 장경호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와 같은 내용이 담긴 편지를 써서 보냈다.
생의 마지막 시기, 동국제강을 자식들에게 넘긴 후 불도에 정진했던 장 회장은 그해 4월 뒤늦게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됐고, 6월 들어 병세가 더욱 악화되자 6남 4녀를 남산 본가로 불러 이같이 말했다.
“나는 이제 광복절을 기하여 가야겠다. 이제는 사업도 기반이 잡혔고 너희들도 먹고 살만큼 도움을 주었다. 나는 내 이름으로 남은 재산 일체를 상속시키지 않고 국가와 사회 그리고 부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갚는데 쓰려고 한다.”
이후 장 회장은 자녀들에게 나눠줄 재산과 개인적으로 갖고 있던 땅 중 산소로 쓸 경기도 광주 땅을 제외한 모든 땅을 처분해 30억6300만원을 마련하고 이를 목록을 작성해 국가에 헌납키로 하고 박 대통령에게 이를 알렸다. 현재 시세로 하면 4000억원이 넘는 큰돈이다. 장 회장의 편지를 읽은 박 대통령은 박태준 포항제철(현 포스코) 사장에게 “연세가 들었어도 순수하다. 애국심이 아니곤 안된다”며 크게 감동해 사재를 관리할 수 있도록 기금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헌납된 기금을 장 회장의 뜻에 따라 쓰일 수 있도록 배려해줬다.
당시 만해도 대기업 재벌의 사재 환원은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를 제외하면 두드러지지 않았다. 이런 때에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고 간 그의 마지막 선행 소식을 접한 국민들은 ‘쾌거’라고 칭송했다.
장 회장은 기업인, 그것도 가장 거친 철강업을 일으켰으면서도 평생을 불자로 보내며 청빈과 사람중심, 비움의 경영철학을 실천했다.
1899년 9월 7일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청소년기 시절 일제의 온갖 만행을 목격한 뒤 1919년 3·1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쫓기는 몸이 돼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불과 1년 만에 귀국했다. 가난한 조국 경제를 부흥시키기 위해 기업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1929년 부산 초량동 중앙시장 뒤에 세운 대궁양행을 시작으로 1935년 광복동에 세운 남선물산에 이어 1949년 조선선재를 설립하며 철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6·25전쟁 직후 부흥과 복구에 매달리던 시절, 못과 철사를 생산하는 조선선재는 큰 돈을 벌었고, 이 자금을 바탕으로 1954년 동국제강을 설립하게 된다. 자손들도 긍지를 갖고 이어받을 수 있는 사업, 국가경제에 기여할 수 있는 애국사업을 고민하던 그가 선택한 것이 쇠를 다루는 사업, 바로 철강사업이었다.
장 회장은 외도를 생각하던 젊은 시절 3남 장상태 사장(2000년 4월 4일 별세)에게도 “사내들이 떳떳하게 헐 사업은 쇠를 달구어 나라에 필요한 공업을 일으켜야 하는 기다. 내말 알겄나? 철강사업만큼 대장부에 걸맞는 사업도 없는 기라”고 가르칠 만큼 철강사업에 모든 것을 걸었다.
재력가로서의 명성이 높았지만 장 회장은 철저하게 근검, 절약 생활을 실천했다. 술과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음은 물론 어려운 국민들을 생각해 하루에 한끼 또는 두끼만 먹고 일을 했다. 허름한 가옥에 기거하면서 선풍기로 여름을 보냈다. 멀쩡한 양복 한 벌 없이 무명옷과 검정 고무신에 만족하고 공장에 갈 때면 늘 길가에 떨어진 못과 나사를 주워 다녔다.
단 한 푼을 헛되이 쓰지 않은 장 회장은 사업에 대한 투자는 과감하고 아낌없이 진행했는데, 모든 이들이 ‘무모한 도전’이라고 여겼던 부산 용호동 앞바다 매립 및 대규모 사업장 공사를 성공적으로 완수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장 회장은 손주들을 불러 놓고 사람됨과 기업인의 자세를 가르쳤다. 손주인 장세주 회장에게 “돈은 왜 버는지 아느냐? 좋은 데 쓰려고 버는 거다. 그걸 누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삶의 보람이 달라진다”고 가르쳤다.
또한 “동국제강은 나의 것도 너희들 것도 아니다. 이 나라의 부강과 민족을 위해 세웠으니 이 나라의 것이요,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존립할 수 없었으니 동국제강은 그들의 것이다”라고 자주 말했다. 이는 장 회장이 후세에게 단순한 장사꾼 재주를 물려준 것이 아니라 구국의 철학과 기업가 정신을 물려주고자 한 것이었다.
사재의 사회환원은 이같은 철학의 마지막 실천이었다. “나의 모든 재산은 나의 것이 아니다. 잠시 위탁관리할 뿐이다. 그러므로 한 푼도 헛되이 쓸 수 없다. 후계 계승발전의 과정에서도 단순한 개인적 상속이나 소유의 개념을 벗어나 국가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활동이나 경영에 그 참뜻을 가져야 한다”는 그의 말을 행동으로 옮겼다는 점에서 재계, 더 나아가 한국 기업역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사회환원을 발표한 뒤 장 회장은 그해 8월 15일 매일 불도 정진하던 서울 대원정사에서 열반에 들어간 뒤 9월 9일 별세했다.
2015년은 장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40주기를 맞는다. 올해 동국제강은 유니온스틸과 합병해 새출발을 했으나 이어 터진 각종 악재로 인해 설립 이후 사상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다.
고난의 길을 겪고 있는 동국제강이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방안은 결국 창업주가 지향했던 회사의 미래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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