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박현주 기자 =국내 최초로 설립된 성평등도서관 개관전에 나온 천경자화백의 작품이 전시 3일만에 철수됐다. 다시 서울시립미술관으로 들어갔다.
16일 오전 9시30분부터 서울 대방동에 위치한 도서관에 걸린 작품이 모두 빠졌다. 전시는 도서관 개관인 14일부터 일주일간 열릴 예정이었다.
이 전시는 성평등도서관의 취지에 맞춰 서울시립미술관(관장 김홍희)이 소장하고 있던 천경자 화백의 작품 26점을 도서관에서 대여한 전시다. 도서관측 관계자는 "고가의 작품이어서 보험가액이 8억원이 들었다"고 말했다. '천경자 해외 여행 스케치전'을 주제로 천 화백이 프랑스 미국등지를 여행하며 스케치한 드로잉 그림들이 걸렸었다.
하지만 전시가 열리자마자 논란이 됐다. 상황은 이랬다.
미국에 살고있는 천경자화백의 딸인 이혜선씨가 강력히 항의하면서 문제가 드러났다.
도서관에 천화백의 작품이 전시됐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이혜선씨가 15일 미국에서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와 "미술관에 있어야 할 그림인데, 동의도 구하지 않고 어머니의 그림을 마음대로 내돌렸다"며 "있을수 없는 일"이라고 성토했다.
이씨는 "만약 그 도서관에서 여성관련 그룹전을 한다고 해 어머니 그림이 1점 정도 소개됐다면 이해할수 있는 일이지만, 이처럼 26점이나 작가와 가족의 동의없이 미술관에서 반출됐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고 흥분했다.
이씨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자신의 동의 없이 반출된 작품을 철수해야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천 화백의 큰 딸인 이씨는 대한민국예술원이 생사논란이 인 천경자화백에게 매월 지급되는 수당을 끊자 "예술원 탈퇴를 요구"해 화제가 된바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측은 "'기증 협약서 안에는 외부에서 전시하면 안된다'라는 내용이 없다"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보였다.
미술관 홍보담당자는 "이 전시는 대외협력전으로 도서관측과 업무협약까지 맺고 진행한 전시이고, 소장품을 더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기위해 전시하는 건 미술관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이씨는 발끈했다. "더 많은 시민들에게 어머니의 작품을 보여주는 목적이라면 미술관에 있는 '천경자의 방'을 더 좋은 기획전으로 관람객을 이끌면 되지, 굳이 작품을 외부로 내보내야했냐"며 조목조목 따졌다. 특히 "항온 항습기능도 갖추지 않고 불특정다수가 출입하는 개방된 공간에 전시되어 훼손과 도난도 우려된다" 며, "작품을 외부로 옮길때는 의논하는게 상식아닌가, 전화 한통도 없이 일방적인 전시 진행은 말이 안된다"며 격앙된 목소리를 높였다.
미술관측은 "협약서 기증 목적에 시민과 후학에게 기여하기 위해서라고 쓰여있다"면서 "수장고에 썩혀서 있는 것보다 세마브런치를 통해서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많은 사람에게 보여주는, 전시를 수행하는게 미술관의 역할이어서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씨는 "그동안 전 시립미술관장이었던 유희영 관장시절 예술원 전시때 딱 한점이 밖으로 나간 것 말고는 없다"면서 "미술관에 있는 작품은 함부로 나가면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씨는 이와관련 미국에서 서울시청에 직접 전화를 걸어 이 문제에 대해 지적했고, 서울시가 이 요구를 받아들였다. 서울시 산하인 서울시립미술관은 결국 전시 3일만에 작품을 다시 미술관안으로 회수하게 된 것이다.
천화백 딸인 이씨는 "나는 어머니의 그림을 지키는게 의무이고, 그것을 어머니와 약속했다"며 "어머니의 그림은 서울시민의 것이지 누군가의 목적으로 이용되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번 논란에 대해 따져봐야할 게 있다. 한 개인 작가의 문제가 아니다.
일반적으로 소장품은 미술관이 관리 전시하는게 맞다. 하지만 기증품은 소장품과 입장이 다르다는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소장품은 미술관에서 매입했고, 기증품은 작가가 무상으로 말 그대로 기증한 것이다. 쉽게 말해 소장품은 미술관측이 전시를 위해 기획전에 마음대로 선보일수 있지만, 기증품은 특히 외부전시기획은 작가나 가족, 협약서의 내용에 따라야 한다는 점이다.
이번 사건은 소장품을 관리하는 미술관의 즉흥적이고 안일한 편의주의가 낳은 아쉬움을 노출했다. 그동안 서울시립미술관의 기증작품 관리부실문제로 천경자화백의 딸 이혜선씨와 미술관이 여러 차례 마찰을 빚어왔고, 특히 미술시장에서 천경자화백의 작품값이 호당 1억~2억선으로 책정되어 있는 점을 감안했다면, 다른 소장품과는 달리 취급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씨는 "미술관의 전시 문화가 제대로 선진화되고 활성화되려면 기증한 작품은 보물처럼 다루어야 한다"면서 "나는 애국자가 아니다. 예술가들을 무조건 대접해달라는게 아니다. 미술관에서조차 작가들을 제대로 보호해야 하지 않으면 누가 하느냐"며 아쉬워했다.
천경자화백은 1998년 서울시 당시 고건시장에 작품 93점을 기증했다. 서울시는 서울시립미술관 내에 70여평 규모의 '상설전시실'을 만들어 영구 전시하기로 협약을 체결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은 천경자 상설전시로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를 타이틀로 한국화 드로잉등 30여점을 소개하고 있다.
한편, 국내에서 생사논란이 됐던 천경자 화백과 관련, 딸 이씨는 "지난해 11월에 입원한뒤로 안좋으신데 기적적으로 하루하루 사신다"며 "의사도 내게 여행을 못가게 해 꼼짝을 못한다. 나는 어머니 지키려고 아플 새도 없지만, 건강하다"고 말했다.
이씨의 말에 따르면 천 화백은 2002년 뇌출혈로 쓰러져 13년째 병석에 누워있다. 천화백은 1991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의 ‘미인도’가 위작 사건에 휘말리면서 한국을 떠났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천경자' 이름값은 세다. 천 화백의 외부전시가 열리는 날 공교롭게도 K옥션에 나온 천화백의 '막은 내리고'(6호)가 8억6000만원에 낙찰돼 다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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