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에 대해 이렇다저렇다 이야기하는 것이 여전히 민망해서요.” 한참을 머뭇거리다 꺼낸 신념은 조심스럽지만 확고했고 설익었지만 단단하게 여물어 가는 중이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셨죠?” 박형식은 제 진심이 오롯이 전달되지 못할까 봐 종종 되묻고는 했다.
“캐릭터의 감정에 완전히 충실해야 하죠. 말투 같은 것도요, 대사를 내 입맛에 맞게 치는 게 아니라 정말 그 사람이 돼서 내뱉는 거예요. 어떤 노력을 해서든지 기필코 감독님, 작가님의 상상 속에 있는 인물을 그대로 구현해내고 싶어요. 감독, 작가와 하나가 되는 거죠. 그럼 박형식은 없는 것 아니냐고요? 경험, 가치관, 감성이 박형식 것인걸요.”
각인을 넘어 낙인된 이미지를 벗어나지 않았던 덕에 별다른 연기 논란 없이 배우로서 작품을 쌓아갔다. 그런 박형식이 결혼을 재테크쯤으로 여기는 재벌가 아들 유창수를 연기한다고 했을 때 그의 성공을 예견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박형식은 느긋한 표정에 장난기 어린 눈빛을 장착한 채로 “난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기는 ‘낮이밤이’한 남자야”라는 민망한 대사를 능글맞게 던지면서, 사랑하는 여자로 인해 뿌리째 흔들리는 신념에 오열하면서 우려를 찬사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박형식은 유창수를 “‘순수’한 사람”이라고 했다. “힘겨움을 모르고 자란 창수가 악할 리가 있을까요? 계급의식이 있을까요? 단지 표현이 서툴 뿐이라고 생각했어요. 가난하면서도 밝기만 한 이지이(임지연)를 보고 ‘마음이 이렇게 하얀 사람도 있구나’하며 호기심이 생긴 것도, 지이를 만나 점점 따뜻하게 변화하는 것도 창수 안에 순수함이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 창수가 친형보다 더 믿었던 친구(성준)에게 ‘넌 네 계급의식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하지 못할 거야’라는 말로 배신당할 때 마음이 오죽했겠어요. 창수가 아무리 재수 없고 싹수없는 말을 해도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나요? 창수 안에 숨겨진 순수함을 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창수가 지이와 헤어지고 어머니 앞에서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결혼은 정말 안 되겠다”며 오열했을 때 박형식에게 16부작 드라마 ‘상류사회’를 통틀어 가장 많은 찬사가 쏟아졌다. 애써 웃어 보이며 “미치겠다, 엄마”라고 툭 내뱉은 박형식은 난생처음 겪는 이별의 아픔이 생경하다는 듯, 엄마 뜻대로 살았던 자신의 꼴이 우습다는 듯 “이게 뭐야”를 되뇌다가, 사랑하는 사람이 마음에 얹힌 듯 가슴을 치며 꺽꺽거렸다.
“이번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장면이에요. 인터뷰 들어오기 전에도 그 신을 다시 봤는데 너무 아쉽더라고요. 제가 느꼈던 감정의 반의 반도 표현이 안 된 느낌이에요. 저는 정말 죽을 것 같았는데 ‘그냥 슬프구나’ 하는 정도로만 전달된 것 같아 또 기술적 한계를 느꼈죠.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 감정이 아직도 해소되지가 않아요.”
박형식은 다시 촬영하는 듯 앞섬을 뜯고 가슴을 쳤다. ‘연기의 기술’에 대한 목마름을 다시 한번 호소했다. “캐릭터와 혼연일체 한다고 다가 아니에요. 그걸 시청자가 어떻게 알겠어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기술적인 면을 채워야죠. 화 난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이렇게(박형식은 테이크 아웃 커피잔을 손으로 구기고, 책상을 내려치고,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여러 가지인데 그것 중에 어떤 것이 가장 공감받을 수 있을지 고민합니다.”
박형식은 인터뷰 내내 고뇌했다. 말하고자 마음을 먹고 나면 거침없이 제 생각을 전했지만 말하기로 결심하는데 꽤 오랜 시간을 썼다. 이유를 물었더니 “유난스럽게 숙제 검사를 받는 느낌”이라고 답했다.
“제가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인데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이 ‘나 숙제 열심히 하고 있어요. 벌써 이만큼 했어요’라고 하는 것 같아요. 말하는 것 자체도 유난스러울뿐더러 나중에 숙제가 완성됐을 때 미숙하면 더 혼날 것 같아 두렵기도 하고요. 혼자 숙제를 잘 끝내서 작품으로 증명해야죠.” 소리 없이 잠잠하다고 강물이 흐르지 않는 것은 아니지. 연기에 목마른 박형식은 바지런하지만 다급하지 않게, 묵묵하지만 멈추지 않고 우물을 파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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