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경술국적과 Noblesse Obl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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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09-06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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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제호]

의정부보훈지청 선양담당 오제호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의 내각 총리대신(국정을 총괄하는 내각의 수반)의 발걸음은 남산의 조선 통감부를 향했다.

대한제국 병탄의 서에 대한제국 전권위원으로서의 이름 석 자를 적기 위해서였다.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의 필두인 그 이름 석 자는 바로 이완용이다.

비록 병탄의 서에 이름을 올리지는 못했지만, 병탄 늑약안을 내각 회의에서 통과시키고 이완용에게 전권을 위임하여 병탄 늑약이 조인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7인이 있어 이완용과 함께 경술국적으로 통칭된다. 대한제국의 중신으로서 어엿한 이름 석 자를 가졌던 이들이 어쩌다가 그 이름 대신에 흉적(凶賊)으로 불리게 된 것일까? 필자는 그 요인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꼽는다.

‘(고귀한 태생인) 귀족의 의무’로 직역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 지도층의 의무’를 뜻한다. 즉 귀족, 공직자, 재력가 등 사회를 교도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에게는 일반에게 모범이 될 만한 행동을 해야 할 마땅한 책무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국권을 보전하고 국토를 보존하며 국민을 보호하는 막중한 책무를 수행하는 위정자들에게 고결한 도덕적 양심에 기반한 의무는 필수적인 덕목이다.

다시 말해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결여된 자에게 국정을 총괄하거나 국가의 한 분야를 책임지는 자리는 어울리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1910년 대한제국의 내각 대신들에게는 국가의 중신으로서 응당 갖추어야 할 자질이 전반적으로 결여되어 있었던 모양이다.

내각총리대신을 필두로 7부대신 중 4명과 황제의 비서실장(당시의 시종원경), 황제의 경호실장(당시의 친위부장관 겸 시종무관장), 황제 비서실 재무관(당시의 시종원경) 등 내각의 요직을 담당한 중신들이 병탄늑약에 적극적으로 협조해 경술국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다. 경술국적 8인을 포함하여 68인의 왕족 및 고관이 나라를 판 공로로 1910년 10월 7일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았다. 일제로부터 후작의 위를 수작한 종친 이해승은 수작에 감읍하여 조상의 묘에 제를 올렸다고 하니, 이들에게 순국 등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가당치 않았다.

물론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고결함을 보인 분들도 계셨다. 괴산군수 홍범식은 국치 당일 국권회복의 유서를 남기고 최초로 순국하신 분이다.

절명시로 유명한 매천 황현, 법무대신과 외교관을 역임한 이범진, 선비 송병순 등도 국치의 책임을 목숨으로 진 분들이다. 1911년 1월 13일 죽음으로 사회 지도층의 의무를 이행했다.

한편 수작자 중에서도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행한 분들이 있는데, 수작을 치욕으로 여겨 자결한 김석진 선생을 비롯해, 조정구·유길준 등 8인은 수작과 은사금을 거부함으로써 강제병탄에 동의하지 않음을 분명히 밝혔다.

경술국적 등 경술년의 수작자 68인에 대하여 그를 옹호하는 혹자는 ‘작위를 받은 일이 일본의 일방적 강요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수작 거부자 8인과 여러 순국자의 존재는 이러한 주장이 궤변에 불과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된 1904년부터 1945년까지 수많은 부일·친일자가 존재함에도 경술국적 등에게만 가혹한 역사의 평가가 내려진 것은 이들이 국운을 결정하는 막중한 사명을 띤 사회 지도층이었기 때문이다.

일제의 통치에 협조한 친일과 매국의 친일을 동일시할 수 없는 것은 그 죄의 경중이 다를뿐더러, 매국의 주도자들이 국가로부터 부여된 사명과 책임에 정면으로 반하는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순국으로 그 사회적 책무를 행한 분들의 존재는 매국으로 사회적 책무를 저버린 경술국적 등의 행보와 극명한 대비를 이룸으로서, 흉적이라는 오명(汚名)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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