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영토·역사문제로 한국에 대한 도발 지속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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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0-01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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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희외교포럼, ‘구한말 역사는 반복하는가’ 주제 좌담회

  • 패널들 "일본에 연약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성장 필요"

  • "일본의 지식인들과 연대해 도움 요청해야" 조언도

아주경제 김동욱 기자 =서희외교포럼(대표 장철균 전 스위스대사)은 지난달 30일 ‘구한말의 역사는 반복하는가’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진행했다고 1일 밝혔다.

장 대표의 사회로
김현철 동북아 역사재단 정책기획실장,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석좌교수, 여인곤 통일연구원 명예연구위원(독일프랑크푸르트대국제관계학박사), 최동주 숙명여자대학교 글로벌서비스학부 교수 등이 참석한 좌담회에서 일본이 영토와 역사문제로 도발을 지속할 것으로 전망하면서 일본과 대등할 정도의 성장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또 일본 지식인들과 연대를 통한 공조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서희외교포럼(대표 장철균 전 스위스대사)은 지난달 30일 ‘구한말의 역사는 반복하는가’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진행했다고 1일 밝혔다. 사진은 아베신죠 일본총리. [사진=중국신문사]


-(장 대표) 올해는 광복과 분단 70주년이다. 민족의 비극은 19세기말 조선의 몰락으로 시작되었다. 밖에서는 서구열강이 몰려와 주변정세가 요동치는데 조선의 대응은 무기력했다. 역사를 돌아보며 자성해 본다면?

여 위원 : 서세동점에 대한 조선의 대응이 무기력했던 것은 사대주의에 빠져있고 부패한 집권층의 근대화를 위한 개혁의지 부재와 주변 정세 변화에 대한 소극적 대처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집권층은 개국 이후 한반도에서 이권 쟁탈을 위한 열강 간의 각축이 전개되는 상황에서 주권을 유지하고 근대화를 위한 개혁정책을 추진하지 못했다.

오히려 위로부터의 개혁 시도인 개화당의 1884년 갑신정변과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인 1894년 동학혁명을 청군과 일본군을 끌어들여 진압하는 등 정권 유지에만 급급하였다.

또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견제하려는 영국 함대의 1885년 거문도 점령사건을 계기로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ㆍ일ㆍ러ㆍ영 간의 다극체제가 형성되어 어느 한 나라의 배타적 지배가 억지되었다.

그러나 당시까지 청을 가장 중시하던 조선은 청ㆍ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러ㆍ일 양극체제가 형성되자 단순히 친러정책으로 전환하는 소극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에 고려시대의 서희 같은 뛰어난 외교전략가가 조선에 있었다면 열강 간의 이러한 역학구도를 조선의 독립을 유지하는데 적극적으로 활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 실장 : 당시 대원군의 쇄국정책과 국내정치에의 간여는 고종의 정치적 입지를 사실상 제한하였다.

그리고 일본과의 수교 및 서구문물의 도입을 반대하는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와 서구 근대국가를 모델로 개혁을 추진하려는 개화파가 서로 대립하는 가운데 일본과 청(중국), 러시아 등 외세가 간여하면서 조선의 개혁 시도(갑신정변, 갑오개혁 등)는 좌절되고 또한 동학농민군과 독립협회 등 아래로 부터의 개혁 운동도 실패했다.

당시는 문호를 개방하여 근대화를 통해 부국강병의 국력을 키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였고 이를 위한 통합된 정치리더쉽의 발휘와 외교정책 등 주요 사안에 대해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는 것이 시급하였다.

결국 구한말 안팎으로부터의 위협과 위기상황에서 타협과 양보를 통한 국민통합과 민족적 대단결을 이루지 못한 것이 망국의 원인이었음을 절감케 하는 교훈을 남기고 있다.

최 교수 : 구한말 상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플라톤의 조선이 마키아벨리의 제국주의 일본의 위협 하에 너무도 무기력하게 서 있는 모습이었다.

당시 조선은 ‘덕스러운 국가’를 지향하면서 국방의 의무를 수호자 계급에게만 부여하고 외국과의 무역ㆍ개방의 위험성을 강조하던 플라톤의《공화국》과 흡사한 유교적 세계관을 가진 ‘은둔의 왕국’이었다.

반면 일본은 마키아벨리가 지적한 대로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고 비르투(Virtu)를 숭상하는 아시아 유일의 국제정치 행위자였다.

실제로 당시 조선이 취할 수 있는 대책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군사력 증강을 통한 자력구제를 도모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차선책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외국과의 동맹마저 일본의 발 빠른 조치로 인해 기회를 상실한 상황이었다.

즉 조선은 BC 2500년 전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강대국 아테네가 약소국 멜로스에 훈계했듯이 “강자는 원하는 것을 하고, 약자는 그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주의 국제정치의 불변의 철칙 앞에 서 있었던 것이다.

신 교수 : 일본의 우경화 현상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그런 점에서 그들의 처사에 대한 한국인의 반사적 대응이 더 이상스럽다.

몽테스키외가 270년 전에 《법의 정신》을 쓰면서 이미 예언한 바와 같이 일본과 같은 섬나라는 이웃에게 끝없는 고통을 준다.

“일본인은 자신들끼리는 의리와 신용을 무겁게 여기면서도 남의 민족에게는 온갖 죄악을 저지르면서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종교적 죄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 몽테스키외의 해석이다.

일본에 가 본 적도 없는 그가 중국의 선교사들과 네덜란드 상관(商館) 자료를 통하여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은 참으로 탁견이자 놀랍다.

일본이 한국에게 역사 문제와 영토 문제를 놓고 도발하는 일은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긴 호흡으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일본 문제에 관한 한, 일정한 체념이 필요하다.

해답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가 저들에게 연약하게 보이지 않을 만큼 성장하는 것이고(그 대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통일이다.) 다른 하나는 살아 있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일본인을 놓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일본의 지성사는 굳고도 오랜 역사를 지닌 양심의 보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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