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삼성중공업 거제조선소가 문을 연 것은 지난 1977년이었다.
하지만 첫 선박을 수주해 건조를 시작한 것은 1979년이었다. 일본에 건너가 기술을 배워온 연수생을 포함해 500여명의 당시 조선 기술자들은 2년의 공백기간을 버텨야 했다. 조선소가 완공되자 세계적으로 몰아닥친 해운 불황으로 인해 수주활동이 전혀 이뤄지지 않았던 것이다. 1978년 한해 만 300여건의 수주문의가 있긴 했지만 끝내 문의로 그치고 말았을 만큼 선박 발주시장은 가뭄 그 자체였다. 사기가 충만했던 기술자들이 일감이 없어 자칫 긴장감이 풀리고 기왕에 닦은 기술이 퇴보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무작정 수주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던 기술자들은 1000t 바지선과 2600PS 예인선 모으는 일을 시작했다. 일종의 ‘시간 때우기’로 이뤄진 이 작업 덕분에 지금껏 건조작업에서 요긴하게 쓰이고 있는 장치물들을 개발했다.
선각공장을 비롯해 목공장, 유틸리티 센터, 대조립공장 자재창고 트러스 제작 등 일련의 작업들과 각종 기초공사 및 도로 포장공사도 이 시기에 다 해냈다. 일에 재미를 붙인 기술자들은 신축 사택의 비품과 심지어 어린이 놀이터 미끄럼틀까지 만들어냈다.
그러다 거제조선소에서 최초로 배, 불배 4척을 만들었다. 이 소형 어선 제작건은 인근 S조선에서 어렵사리 따내 온 것이었다. ‘조선쟁이들이 일손 놓고 있으면 기술이 녹슨다’는 위기감에서, ‘기술에 녹이 슬지 않게 하는 방법으로 가장 적절한 것이 작은 배라도 만드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됐다.
◆SPP직원의 ‘생사를 건 호소문’
제조업 사업장은 24시간 365일 생산을 해야 한다. 경영진들이 총괄하고 간부들이 현장을 지휘하고 직원들은 열심히 뛰어야 한다. 대규모 자금이 투자된 거대 사업장일수록 일을 해야 한다. 더군다나 조선·플랜트와 같은 수주산업은 일감을 따지 못하면 곧바로 조업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에 영업 중단은 사실상 해당 기업에 대해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름없다.
SPP조선 임직원들은 지난 24일 ‘회사가 회생할 수 있도록 신규 수주를 승낙해 달라’는 내용의 호소문을 통해 “지난 2014년 이후 채권단 통제로 신규 선박수주가 이뤄지지 않아 내년 상반기에는 평상시 가동률의 50% 정도에 그치고 내년 연말이면 문을 닫아야 할 처지에 빠졌다. 우리 조선소가 문을 닫지 않도록 선박 신규 수주를 승낙해 달라”고 호소했다.
SPP조선은 채권단이 3000억원을 투입해 주는 조건으로 2016년까지 수주영엽을 금지시켰다. 조선·해운시장 조사기관인 클락슨리포트에 따르면 SPP조선은 수주중단으로 2017년 이후 인도물량 계획 물량이 없는데다가 수주잔량도 미비해 지난 6월말 이후에는 주요 업체 명단에서도 제외됐다.
모든 조선소는 일감이 있건 없건 고정비용이 나간다. 공장과 크레인, 자동차 등의 감가상각비, 직원 월급 등이 고정비용에 속한다. 이러한 고정비용을 충당하려면 영업을 해서 1원이라도 이윤을 남겨야 마련할 수 있는 돈인데, 채권단은 영업을 중단시킨 것이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저가수주 때문이다. 그런데, 채권단 관리기업은 채권단이 임명한 경영관리단과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담당한다. 경영관리단 감독 체제에서는 채권단의 승인 없이는 수주를 할 수 없다. 특히나 상선 가격은 철저히 발주사와 수주사를 양대 축으로 하는 시장에서 결정된다.
◆영업중단=자살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영업이 상시적으로 진행돼야 한다는 것이다. 상선 한 척, 플랜트 한 기를 수주하기 까지는 최소 2년 이상이 소요된다. 선사나 발주처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 발주 정보를 일급기밀로 취하기 때문에 수주업계 영업직원들은 발주처와 연을 맺고 있는 선박이나 브로커들로부터 정보를 입수하고 이들이 제시한 사양에 맞춰서 제안서를 준비한다.
발주처와의 오랜 기간 인연을 맺은 영업 담당자와 설계도 작성 및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는 엔지니어링 전문가, 적정 이윤을 지키면서 경쟁사보다 낮은 금액을 짤 수 있는 원가 전문가, 조선소내 조업과정을 분석해 제 시간에 납기를 할 수 있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생산관리 전문가, 기자재와 부품 등을 적기에 공급할 수 있을지를 판단하는 조달 전문가, 최근에는 발주처나 선사가 원하는 금융 문제를 해결하고 전체 건조 또는 설계과정에서 유동성을 해결할 수 있는 금융 전문가 등이 팀을 이뤄 제안서를 만든다.
그렇게 만든 제안서로 입찰에 응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 다시 발주처와 세부협의를 통해 최종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이러한 선박 및 플랜트 수주는 영업맨들의 능력이 성패를 좌우한다. 이들은 끊임없이 선주 및 발주처의 상황을 파악하고 최고경영자(CEO)와 인간적으로 교류하며 그들에게 무한신뢰를 갖게끔 한다. SPP조선이 5만DWT(재화중량톤수)급 석유화학제품운반선(MR)에 특화할 수 있었던 것도, 성동조선해양이 선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200척이 넘는 선박을 육상에서 건조할 수 있었던 것도, 삼성엔지니어링이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중동에서 연속적으로 수주를 할 수 있었던 배경은 결국 영업맨들이 선사들에게 믿음을 주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선사 및 발주처와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최소 비용으로 최고 품질의 선박·플랜트를 최단 기간에 건조·건설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하지만 이를 뛰어넘어 수주를 성공시킬 수 있는 비결은 선사·발주처와 인간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삼성중공업 등 글로벌 빅3를 비롯한 한국 조선업계와 삼성엔지니어링을 필두로 한 플랜트 업계들은 장기간 글로벌 빅 발주처와 맺은 이러한 인연을 이어왔기 때문에 중국, 일본 등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을 세계 1위 조선국가로 키워낼 수 있었다.
이렇듯 중요한 영업을 채권단은 하지 말라고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목을 매달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수주영업 장려해야
김현철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 일본 전공 교수는 일본의 사례를 통해 한국기업의 미래 생존방안을 제시한 저서 ‘저성장 시대, 기적의 생존 전략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통해 영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저 성장기가 되면 보통의 기업들은 경비를 줄임으로써 이익을 확보하려고 한다. 하지만 경비를 줄여봤자 매출원가나 판매관리비의 일부밖에 줄일 수 없다. 오히려 매출액을 유지하면 줄일 수 있는 경비의 규모도 커지기 때문에 손쉽게 경비를 줄일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출액이 늘어나면 경비를 크게 줄이지 않고도 이익을 확보할 수도 있다. 이처럼 저성장기에 보통의 기업들이 경비를 줄이는 데 관심을 기울이지만 실제로는 줄어드는 매출을 유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 때문에 매출을 유지하는 영업활동이 저성장기가 되면 더욱 각광을 받는 것이다.’
김 교수의 입장에서 봤을 때, 채권단은 경제의 기본적인 상식을 뒤집는 오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실을 털어내겠다고 수주영업을 중단시켰다가 최근 더 큰 부실을 초래한 성동조선해양의 교훈을 채권단은 자기 책임이 아니라며 발뺌하고 있다. 답답한 노릇이다.
발주·수주산업은 2~3년후 미래를 가늠하는 지표다. 2~3년 후의 경기를 전망한 뒤 발주 여부가 결정된다. 올해 발주처의 발주가 많다는 것은 2~3년 후 경기가 호전일 것임을, 축소됐다는 것은 불황이 지속될 것임을 의미한다.
올해를 포함해 최근 2년여 동안 선박·플랜트 발주가 크게 줄었다. 반면 공급초과인 수주산업은 구조조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해 치킨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 수주산업은 일감 구하기를 중단하고 손가락만 빨고 있거나, 아니면 문을 닫아야 한다. 무엇보다 수주영업이 2년 넘게 중단되면 기존 고객들도 이탈할 것이 분명하다. 회사나 영업이나 새로 만드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 한 번 무너진 것을 복구하는 것이다.
채권단은 SPP조선 매각 작업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일감도 없고 영업망도 무너진 기업을 제값받고 팔기도 어렵고, 그만큼 누가 사려고 하지도 않으려고 할 것이다. 설사 인수를 하더라도 껍데기만 남은 회사를 부활시키려면 그만큼 자본이 투자돼야 하기 때문에 여력이 없는 새 주인도 다시 무너질 수 있다.
제대도 된 상식이 있는 채권단이라면 오히려 더욱 더 영업을 장려해서 현 상황을 타파해야 한다. 영업을 장려하지만 저가 수주에 대한 우려에서 벗어나기 위해 구조조정의 방향을 인위적인 인원 축소, 불용자산 매각 등 안이한 방법에서 벗어나 공정 자동화, 생산시설 개선 등 기업의 경쟁력을 높여주는 방향으로 추진해야 한다.
산업게에서 끊임없이 이같은 주장을 펴고 있으나 정작 귀를 기울여야 할 정부 관련 부처와 정책·금융기관 및 채권단은 받아들이기는커녕 변명만 내세우며 자기들 고집을 밀어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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