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007 어나더 데이 (Die Another Day)’의 실패로 007시리즈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었다. 역대 최고의 본드로 불리던 피어스 브로스넌은 매너리즘에 빠진 연기로 대중에게 외면당했고, 결말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급기야 007시리즈는 1995년 ‘007 골든 아이 (GoldenEye)’를 성공시켰던 마틴 캠밸 감독을 구원투수로 다시 소환했고,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찾아 나섰다. 과연 누가 숀 코넬리, 로저 무어와 같이 당대 최고의 미남들에 이어 6대 본드를 맡을 것인지를 두고 모든 영화계의 관심이 쏠렸다. 하지만 결과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바로 험악한 인상의 추남, 신사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푸른 눈의 다니엘 크레이그가 낙점된 것이다.
더군다나 2006년 개봉한 ‘007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은 007시리즈의 스토리를 영화 원작인 이안 플레밍의 동명 소설과 맞춰 처음부터 다시 쓰는 모험을 했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와 구성을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 냈다. 특히 다니엘 크레이그의 마스크와 본드의 바뀐 성격은 그 구현의 정점에 위치한다. 원작에 등장하는 “말없고, 잔인하고, 아이러니하고, 냉혹한”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재림한 것이다.
이 성공에 힘입어 개봉한 ‘007 퀀텀 오브 솔러스 (Quantum Of Solace, 2008)’는 마틴 캠밸이 재건한 기틀을 다시 무너뜨렸다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크레이그의 입지는 더욱 굳혀졌다. 전작을 뛰어넘는 호쾌해진 액션과 안정감이 생긴 연기는 그를 완전한 ‘제임스 본드’로 인정받게 해줬다.
그리고 007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 ‘007 스카이폴 (SKYFALL, 2012)’과 조우했다. 크레이그는 ‘레볼루셔너리 로드’(2008) 등을 연출한 명감독 샘 멘더스가 생애 최초로 액션 영화 메가폰을 잡도록 직접 설득했다고 전해진다. 샘 맨더스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영화 역사에 남을 오프닝 시퀀스와 음악은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와는 다른 파격적인 이야기 전개와 액션으로 흥행 수입 10억달러(약 1조1500억원)를 벌어들이며 ‘카지노 로얄’의 흥행 기록을 깨버렸다.
최근 개봉한 ‘스펙터’는 다니엘 크레이그의 이별 작이 될 예정이다. 이번 편을 마지막으로 007시리즈와 계약이 만료되는 크레이그는 이미 수차례의 인터뷰를 통해 “지쳤다”고 밝힌 바 있다. 이미 저돌적이고 현실적으로 변한 007시리즈의 액션을 소화하기에는 만 47세인 그의 나이는 너무 많다. ‘스펙터’는 그의 내리막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는 작품에서 잘 뛰지 않으며 전처럼 활기차지도 않다. 스토리도 그리 역동적이지 않고, 지나치게 차분하고 침착하며 늘어진다. 작품 자체로도 ‘스펙터’는 전작 ‘스카이 폴’에 비해 혹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너무나 강렬했던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와의 이별을 준비하기에 오히려 조금 아쉬운 ‘스펙터’의 완성도가 위로가 될 수도 있다. 절정의 순간 그가 떠났다면 오히려 아쉬움은 더 컸을 것이고 본드를 버린 그를 원망했을 지도 모른다. 이제 새로운 본드를 기다려야 할 때다. 하지만 역사상 누구보다 강렬하게 각인된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는 어느 배우에게나 부담이 될 것이 분명하다. 다니엘 크레이그는 분명 영원히 제임스 본드로 기억 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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