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 기획-그레이트 코리아] 박세일 “보수는 철학 없고 진보는 정책 없다…‘개혁적 보수’·‘합리적 진보’ 양립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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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5-12-07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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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⑮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 인터뷰 <上>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지난 3일 서울 퇴계로 한반도선진화재단에서 아주경제의 광복 70주년 기획 '그레이트코리아'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아주경제 최신형 기자(정리) =한쪽으로 쏠리지 않았다. 말 그대로 '중용의 가치'였다. 서구의 가치인 '자유주의 이념'과 동양의 가치인 '공동체 정신'의 전면적 결합을 꾀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기초와 평등분배 연대의 조화를 주장했다.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의 '공동체 자유주의' 얘기다. 한국의 보수는 질서에 안주하는 '기득권 보수',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퇴행적 보수', 자기희생을 거부하는 '이기적 보수'라고 잘라 말했다. 철학적 보수가 없다는 얘기다. 진보진영을 향해서는 이념적 진보는 많지만, '정책적 진보'가 없다고 주장했다. 정치적 국면마다 극한 보·혁 갈등으로 치닫는 한국 사회의 해결책으로 △헌법가치 공감 확산 △역사 바로세우기를 꼽았다. 박 명예교수와의 인터뷰는 지난 3일 서울 퇴계로 한반도선진화재단에서 본지 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과의 대담 형식으로 1시간30분간 진행됐다. 박 명예교수의 인터뷰는 1·2편으로 나눠 싣는다.

-본격적인 현안 질문에 들어가기 전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서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별 거산(巨山)이 영면했다. 문민정부 당시 '세계화 담론'을 만든 핵심 브레인으로, 거산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남달랐을 것 같다.

"YS 서거 때 미국에 있었다. 급하게 일정을 조절해 귀국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이 들더라. YS 서거 이후 문민정부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정치지도자나 국가지도자에 대한 공정한, 그리고 균형 있는 평가는 반드시 필요하다. 만일 객관적인 평가를 하지 않는다면, 미래에 훌륭한 지도자가 나오기 힘들다. 그런 의미에서 YS에 대한 재평가작업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YS의 가장 큰 업적이 뭐냐, '잘못된 제도와 낡은 관행의 근본적 청산',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미래비전 제시', '대탕평책', '철저한 의회주의' 등 네 가지다."

-YS의 개혁이 한국 정치·경제·사회 변혁의 기초가 됐다는 평가가 많다. 동의하나.

"잘못된 제도와 낡은 관행의 근본적인 청산작업은 YS 취임 직후부터 단행됐다. 대표적인 게 '금융실명제'다. 1992년 대선 당시 언론 등에선 '금융실명제 하나만 해도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다한 셈'이라고 했다. 그만큼 대단히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나회 척결과 공직자 재산공개 등도 있다. 사법·교육·노동·복지 등 전 분야에 걸쳐 개혁을 진행했다. 산업화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국가시스템 전체를 개조한 것이다. YS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바로 '세계화 선언'과 '정보화 개혁'에 착수했다.

-문민정부의 세계화 구상을 직접 구상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94년 세계화 구상을 만들었다. 꼬박 100년 전이 갑오경장(1894)이더라. 갑오경장에도 불구하고 당시 조선은 근대화 개혁에 실패했다. 문민정부 때 세계화 선언으로 국가의 개혁의지를 뚜렷하게 했다. 정보화 개혁도 잘했다. 체신부가 정보통신부로 전환한 것이 그때다. 지금 정보화 부문에서 세계 1위 아닌가. 본격적인 지방자치 시대를 연 것도 YS의 업적이다."

-현 여야 정치권에는 YS를 '정치적 아버지'라고 말하는 이른바 'YS 키즈'들이 많다. 가까이에서 본 YS의 인재철학은 어땠나. 더불어 정치철학도 말해 달라.

"YS 인재철학의 핵심은 '대탕평책'이다. 각 분야 전문가는 물론 보수·진보를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했다. 노무현·이명박 전 대통령, 이인제(새누리당 최고위원), 이재오(새누리당 의원), 김문수(전 경기도지사), 이수성·이홍구(전 국무총리), 손학규(새정치민주연합 전 상임고문) 등등 얼마나 많이 있나. 전직 대통령이 2명이나 나왔다. 대단한 일이다. 그리고 YS는 '철저한 의회주의자'였다. 유신시절 일화다. YS가 해외에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귀국을 만류했다. 하지만 YS는 박차고 국내로 들어왔다. 서슬 퍼런 유신시절 국민 옆에 있었다. 신군부 시절 가택연금 당시 정권은 강제출국을 유인했다. YS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리투쟁에 나서지도 않았다. 의회가 닫혔을 땐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었지만, 국회가 열려 있는 한 언제나 의회 내에서 투쟁했다."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고(故)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업적으로 '잘못된 제도와 낡은 관행의 근본적 청산',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연 미래비전 제시', '대탕평책', '철저한 의회주의' 등 네 가지를 꼽았다. [사진=아주경제 기자 timeid@]


-그간 YS와 문민정부가 저평가된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나.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화, 즉 승자 독식의 경제시스템 고착에 한몫 했다는 지적도 있다.

"YS가 저평가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정권 말인 1997년의 외환위기 도래다. 다른 하나는 그해 정권교체 때문이다. 외환위기는 한 국가의 한두 정책에 의해서 초래되는 것이 아니다.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터진 거다. 특히 금융자본이 당시 동남아시아부터 터지면서 특정 지역의 금융부문을 파탄 낸 것이 외환위기다. 정권의 정책 실패라기보다는 세계 자본주의 금융현상으로 보는 게 맞다. 그리고 정권교체가 되면 전임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시대마다 정권의 정책 수립 및 국정과제, 리더십 스타일 등을 끊임없이 변화·혁신해야 한다는 말로 들린다.

"이승만 전 대통령부터 김대중(DJ) 전 대통령까지의 정치와 그 이후는 달랐다. 이승만·박정희·YS·DJ까지는 '역사를 바꾸는' 게 정치의 목적이었다. 변화와 개혁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는 얘기다. 실제 이승만은 건국과 독립, 박정희는 산업화를 통한 절대빈곤의 탈출을 추진했다. 민주화도 마찬가지였다. 캄캄하던 시절, 횃불을 들고 민주화 시대를 열었다. 그 누구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정치는 달랐다. 기득권에 안주했다. 시대에 밀려서 특권과 기득권을 적당히 나누는 수준에 그쳤다. 이승만부터 DJ까지는 '변혁적 리더십'(transformational leadership)이라면, 지금은 '거래적 리더십'(transactional leadership)이다. 전자는 없고 후자가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국민들이 현 정치권에 실망하고 정치혐오를 가지는 이유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것인가.

"그렇다. 역사를 개척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국가목표 제시와 대대적인 국정개혁이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정치는 그런 역할을 못 한다. 국정개혁은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다. 아니, 실종되고 있다. 그것이 대한민국 정치가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원인이다. 그러다 보니까 국가의 '발전동력'이 꺼지는 게 아니냐. 경제가 어려운 것은 정부의 한두 가지 정책 때문이 아니다. 국가 발전동력의 약화 때문이다."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국의 보수는 질서에 안주하는 '기득권 보수',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퇴행적 보수', 자기희생을 거부하는 '이기적 보수'"라고 잘라 말했다.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기자 timeid@] / [기사정리=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tlsgud80@]


-여야 혹은 보수·진보 정치권 모두 낡고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 필요하다. 문민정부 때는 '세계화 담론', 이명박 정부 시절 당시엔 '선진화 담론' 등을 고안하면서 합리적 보수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했다. 합리적 보수는 기존의 타성에 젖은 보수와 무엇이 달라야 한다고 보나.

"보수는 두 가지 가치를 소중히 해야 한다. 자유와 공동체다. 자유는 '국가발전', 공동체는 '국민통합' 원리다. 공동체에는 가족 공동체와 국가 공동체가 있다. 즉, 보수는 공동체를 소중히 하는 자유주의자다. 그것이 진정한 보수다. 보수가 끊임없이 자기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다. 진정한 보수는 '개혁적 보수'다. 그리고 '발전적 보수'다. 이것이 대한민국 보수의 주류가 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 보수 중 일부는 질서에 안주하는 '기득권 보수', 변화와 개혁을 거부하는 '퇴행적 보수', 자기희생을 거부하는 '이기적 보수'다. 정치적 보수는 많은데 '철학적 보수'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진보진영이 안고 있는 문제는 무엇인가.

"진보도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이념적 진보는 많지만, '정책적 진보'가 없다. 진보의 가치는 '평등'과 '연대'다. 진정한 진보는 평등과 연대의 가치를 구체적인 정책으로 실천해야 한다. 구호적 진보로는 새 시대를 열 수 없다. 구호적 진보에 그치거나 일부 친북·종북성까지 보이는 진보는 비(非)진보 내지 반(反)진보다. 우리가 선진화 시대를 열려면 '개혁적 보수'와 '합리적 진보'가 나와야 한다. 그래야만 통일이든 선진화든. 미래지향적 정치시대가 열릴 수 있다."

-87년 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꾀했지만, 경제·사회적 양극화로 실질적 민주주의로 가는 길은 요원한 상황이다. 결국 87년 체제 극복을 통해 실질적 민주주의의 길로 나아가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통해 군사독재를 극복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어떤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없었다. 민주화세력도 국민도 군사독재만 없으면 저절로 민주주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러자 '과잉 민주주의'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목소리가 큰 이익집단이 등장했다. 대중영합주의만 좇는 정치인이 나왔다. 상업주의 언론이 출현했다. (심지어) 이 세 가지가 유착했다. 그 결과, 천민 민주주의로 전락했다. 나라의 비전과 국정이 흔들리는 이유도, 낮은 생산성으로 국민이 좌절하는 이유도 모두가 천민민주화 때문이다. 과잉민주화 천민민주화를 막고 적정민주화를 이루는 노력이 본격화돼야 한다. 장기 국가이익과 단기 국민이익과 집단 이익을 조화하는 방법을 제도화해야 한다."

-현실은 정반대다. 여야 정치권은 정치적 사안마다 진영논리로 일관하고 있다. 여의도 정치권이 극한 보·혁 대결의 덫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두 가지가 원인이 있다. 먼저 우리 사회가 헌법과 헌법적 가치를 소중히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공동체는 이익공동체가 아니다. 가치공동체다. 즉, 헌법적 가치를 소중히 하는 가치공동체이다. 그런데 우리사회에서는 헌법적 가치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대단히 부족하다. 정치지도자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어떤 지도자는 ‘그놈의 헌법’이라고 하지 않았나.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자부심과 자긍심 부족이다. 역사에 대한 자부심에서 애국심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교육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을 높이기보다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부정하는 방향이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이 대한민국에 대한 자긍심과 자부심 그리고 소속감이 낮다. 대한민국 역사에 대한 공격이 학교에서 공공연히 이뤄지고 있지 않은가. 일각에선 ‘정의가 실패한 나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해 오지 않았나. 국민분열과 갈등을 줄이고 국민통합을 위해선 우리 모두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소중한 가치’(헌법)와 ‘소중한 나라’(올바른 역사교육)를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헌법 가치 공감 확산과 역사바로세우기다."

 

박세일 서울대 명예교수 겸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 [사진=아주경제 남궁진웅 timeid@]


[대담=박원식 부국장 겸 정치부장 / 정리=최신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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