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뒤, 10년 뒤에도 연구를 할 수 있다는 '안정감'과 '내 연구'를 할 수 있는 자유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미국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신경과학 분야를 연구하고 있는 이성진(39·남)씨는 고민이 많다. 한국에서 안정적인 직장의 수는 점점 줄어드는데 반해 이를 원하는 박사급 인력의 수는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에서는 해외로 나간 인재들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지만 현실적인 부분을 생각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직장의 수는 점점 줄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에 있는 대학과 연구소, 기업은 해외에 있는 우수 한인 과학자들에게 취업 기회를 제공해도 오지 않는다고 아우성이다. 거꾸로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한인 과학자들은 한국에 '자리'가 없다고 토로한다. 특히 생명과학 분야에서는 ‘포스닥(박사후연구원)으로 세계 일주’라는 자조 섞인 말이 회자될 정도로 박사급 인력이 비정규직으로 전전하는 사례가 많다. 국내에서는 기초과학연구원이 설립돼 조금 숨통이 트이긴 했지만 갈 곳이 부족한 것은 여전하다. 이 같은 간극이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초과학연구원(IBS)은 4~5일(현지시간) 이틀에 걸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활동하고 있는 '콜리스(KOLIS·Korean Life Scientists in the Bay Area)' 회원들과 간담회를 열고 해외에서 공부하고 있는 우수 인재의 유치를 위한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간담회에는 고규영 IBS 혈관연구단장(KAIST 의과학대학원 교수)과 김진수 IBS 유전체교정단장(서울대 화학부 교수), 김성기 IBS 뇌과학이미징연구단장(성균관대 글로벌바이오메디컬엔지니어링학과 교수) 등 3명의 생명과학분야 연구단장과 유영준 IBS 연구지원본부장이 함께했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연구원(IMD)은 한국의 두뇌유출 지수가 3.98로 61개 조사국가 중 44위에 올랐다고 밝혔다. IMD가 고안한 이 지수는 0에 가까울수록 고국을 떠나 해외에서 근무하는 인재가 많아 국가경제 피해가 심하고 반대로 10에 가까울수록 인재가 대부분 고국에서 활동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조사 대상 61개국 중 두뇌 유출이 가장 적은 국가는 노르웨이(1위·8.27), 스위스(7.56), 핀란드(6.83), 미국(6.82) 순으로 나타났다. 한국은 44위로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인재는 해외 취업 수가 적기 때문에 이 지수는 사실상 이공계 분야 인재들의 두뇌유출을 의미한다. 과학기술계에서는 고급 인력을 유인하고 정착시킬 수 있는 연구 환경이 국내에는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김진수 단장은 "90년대만 해도 해외에서 공부하는 한인 과학자의 80%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며 "한국이 부족해도 많이 들어왔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4~5일 이틀동안 만난 콜리스 회원들도 이같은 문제점을 이야기했다. 스탠퍼드대 의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혜련씨(37·여)는 연구문화에 대해 지적했다. 한국 대학에서 학사와 석사, 박사학위를 받은 이 박사는 "미국은 전반적으로 박사후연구원에게 연구의 자율성을 주는 경향이 있다"며 "기업이건 학교건 간에 박사급 연구자라면 지위를 막론하고 동등하게 대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적으로 퍼져 있다"고 했다.
이처럼 연구에 있어서 자율과 독립을 확보하는 것이 인재를 유치할 수 있는 전제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박사는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가 아이디어도 가장 많고 연구력이 왕성할 때"라며 "이때 연구 할 수 있는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스탠퍼드대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김재익씨(38·남)는 "우수 인재들이 원하는 첫 번째 직장은 바로 '교수'"라며 그 이유는 "원하는 연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담회에서는 일본에 존재하는 '장인정신'을 과학계에 퍼트려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일반 제품을 만들 때는 10점 만점에 7점만 넘어도 소비자에게 만족을 줄 수 있다. 한국은 '빨리빨리' 문화와 성과주의로 인해 빠르게 7점을 만드는 일에 익숙하다. 스마트폰처럼 한 분야에 늦게 뛰어들어도 금세 좋은 성과물을 낼 수 있는 이유다.
일본은 이를 10점까지 끌어올리는데 주력한다. 이성진 박사는 "제품에서 7점과 10점의 차이는 크게 없지만 기초과학 분야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라며 "성과 위주의 한국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다면 우수 인재 유치는 어려울 수 있다"고 설명했다.
창의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되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도전적인 연구를 하되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연구과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할 경우 다음 과제 연구비를 받기가 어렵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창의적인 연구 보다는 성공이 가능한 연구에만 매달린다는 지적이다.
UC버클리에서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김준연씨(24·남)는 "한국은 승자독식 사회로 한 번 실패하면 끝이라는 인식이 있다"며 "이곳은 실패해도 길이 있고,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고 했다. 이성진 박사는 "안 될 것 같은 연구에 투자하는 기업, 연구소, 대학이 많아져야 기초과학 발전은 물론 우수 인재를 유치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31년간의 미국생활을 접고 IBS 연구단장으로 귀국한 김성기 교수는 “과거와 비교했을 때 국내 연구환경도 점점 나아지고 있다”며 “IBS가 기초과학의 새로운 연구문화를 만들어 가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영준 본부장은 "IBS는 박사후연구원이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YS프로젝트' 등을 통해 젊은 과학자의 창의력을 발현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학생들의 바람을 정책에 반영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라고 덧붙였다.
<샌프란시스코/미래부 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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