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화약은 진실하다. 화약은 반드시 폭발하기 때문이다. 화약은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폭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화약을 만드는 사람은 경영자를 중심으로 관리자, 기술자, 기능원 모두가 화약처럼 진실하고 정직해야 한다. 또 화약사업의 리더들은 인간성 중시의 리더십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현암(玄巖) 김종희 한화그룹 창업자의 경영철학은 이 한마디로 집약된다. 현암이 화약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일제 말기 서울의 명문 경기도립상업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일본인이 운영하던 조선화약공판에서 일하던 그는 화약이 총이나 대포 등 무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산업용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깨닫고 평생을 화약계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해방과 6.25 전쟁을 겪으며 목숨을 담보로 하는 위험한 순간을 많이 겪었지만, 많은 돈을 한꺼번에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있었다. 생활필수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화학공업 제품이나 비료, 설탕, 약품 등을 해외에서 수입해 팔아 큰 이윤을 남긴 기업가가 많았다.
현암이 1952년 설립한 한국화약주식회사(현 한화그룹) 직원들도 수입사업을 해보자며 거듭 요청했다. 그럴 때마다 현암은 의견을 단칼에 거절하고, 오히려 화약을 수입했다.
“몇십 배가 남는다고 해도 난 설탕이나 페인트를 들여올 달러가 있으면 단 얼마라도 화약을 더 들여올 것이다. 나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하는 송충이다. 화약쟁이가 어떻게 설탕을 들여오나? 난 갈잎이 아무리 맛있어도 솔잎이나 먹고 살 거야!”
현암이 화약에 집착한 것은 조국 근대화를 위해 무엇보다도 기간산업에 ‘우선순위’를 둬야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화약의 국산화가 요원하던 시기, 화약을 수입해 제때 적정량을 공급해 경제 불모지였던 조국을 재건하기는 데 기여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다.
6.25전쟁 시기 피난을 가는 대신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에 있던 화약고로 달려가 다이너마이트 3000상자를 지켰다.
전후 화약공판을 마음대로 주무르던 미국 고문관에게 가격 인상보다 해방전 가격유지를 요구, 당시 한 가래에 50전이던 엿가락보다도 싼 30전에 화약을 보급했다. 1955년 인천화약공장을 보수·신축해 본격적인 화약사업을 개시한 현암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국내 최초로 다이너마이트 생산에 성공, ‘한국의 노벨’‘다이너마이트 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약과 함께 현암이 추구하려 했던 정신은 ‘정직과 책임’이었다. 1977년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의 화약 열차가 이리역에서 폭발하는 사고가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1400여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으며 61억원에 달하는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창업 이래 최대 위기를 맞은 현암은 피해 복구에 직원을 투입하고, 책임을 통감하는 사과문과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인 90억원을 피해 보상금으로 내놓았다.
잘못을 인정하고 모든 책임을 떠안은 결과, 한국화약은 재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해 재계 10대 기업으로 올라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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