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정권'보다 더한 가진 자의 '갑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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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1-24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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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경제 정하균 기자]


아주경제 부산 정하균 기자= 문치주의에 입각한 고려의 귀족정치는 무신의 사회적 몰락을 초래했다. 정치·경제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무신들에 대한 천대는 의종 때 극에 달했다.

그 때문에 일찍이 최질(崔質)·김훈(金訓) 등의 무신이 주동이 돼 쿠데타를 일으킨 일까지 있었다. 생활상으로도 크게 곤란을 받던 무신들의 불만은 오병수박희(五兵手縛戱)를 계기로 폭발했다.

무신의 난은 1170년 의종 24년에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주도해 일어났으며 최충헌까지 이어진다.

이 반란의 성공으로 무신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했으며, 많은 문신을 살육했다. 이후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했던 시기를 '무신정권'이라 부른다.

무신정권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역사는 이들이 거병(擧兵)의 이유로 주장한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는 목적. 즉,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며 많은 이들을 살육한 것을 정당화하지 않는다.

특히 그 중에서도 최씨 집권기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면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인사권을 함부로 한다든가 몽고군 침입시에 정권의 유지를 위해 육지를 버리고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사실, 이때 육지의 백성들은 내버려 둔 채 강화에서 향락을 일삼은 사실들은 이러한 시각을 뒷받침하고 있다.

이러한 무신정권은 소위 국가가 백성들을 병탄하는 최고의 '갑질' 이었다.

고려말 권력을 가진 강자의 병탄을 잘 보여준 SBS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길태미 대사("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약자는 강자한테 빼앗긴다. 강자는 약자를 병탄(倂呑)하고 인탄(蹸呑)한다. 이것만이 변하지 않는 진리야")가 눈길을 끈 이유는 백성을 위한 국가가 아닌, '국가를 위한 백성이 존재의 이유'라는 시대적 상황을 잘 표현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세기 들어 거병한 군부독재 역시 수많은 살생을 통해 만들어진 정권이었다. 이 또한 역사는 인정치 않을 것이며, 그 상흔 역시 치유되지 않고 있다.

1000년전의 무신들과 다를 게 없다는 애기다.

우리는 아직까지 그때의 흔적과 기억을 품고 살아가고 있다.

국민을 위한 국민을 향한 정치를 펼치겠다던 초심은 결국 무인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욕을 채우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갑질'은 권력자의 소유물만은 아니다.

지난해 비행기 회항 소동으로 '땅콩회항'이란 수식어를 남긴 대한항공 조현아 전 상무가 일으켰던 '갑질'의 경우, 대한항공은 빠른 사과나 사태 수습을 게을리함으로써 기업 신뢰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최근 일어난 몽고식품 김만식 전 명예회장 역시 직원들에게 폭언과 폭행을 상습적으로 일삼았다는 사실이 언론보도를 통해 알려지면서 재벌가('가진 자')의 '갑질'과 비인격적인 태도에 국민은 또다시 분노하고 있다.

필자는 김 전 회장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지금의 몽고식품 행태에 대해 대한항공의 사례가 떠올려지며 '갑질' 중의 '갑질‘을 보여준 사례로 봐도 무방하다고 본다.

현 시대의 젊은이들을 보라. 어렵게 대학에 들어가 졸업을 압둔 취업준비생들. 어떻게든 회사에 들어가기 위해 영혼까지 판다는 풍문이 들릴 정도로 현대의 취업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는 것보다 어렵다.

어렵게 들어가 인턴에서 정직원으로, 평직원에서 간부로 승진하는 것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이제 막 사회에 진입한 청년 세대들에게도 일자리는 곧 '인간다운 삶'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존재 가치를 직원이 아닌, 오너 개인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몰지각한 이들의 행태에 피해를 보는 쪽은 결국 누구란 말인가!

얼마 전 경남에 있는 모 기업 대표를 만났다.

그는 평사원으로 입사해 오너의 자리까지 오른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회사가 있어 직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직원이 있어 회사가 있는 것이죠. 회사는 직원들을 통해 성장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기업이죠"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에 맴돈다.

노자는 도덕경을 통해 상선약수(上善若水 : 지극히 착한 것은 마치 물과 같다는 뜻으로,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아니하는 이 세상(世上)에서 으뜸가는 선의 표본으로 여기어 이르던 말)를 주장했다.

'논어(論語)-헌문편(憲問篇)'에 보면 이런 구절도 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로움을 보거든 목숨을 바쳐라"

이 글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뤼순 감옥에서 쓴 글귀로 유명한 말이다.

오늘도 '갑질'을 일삼는 자들에게 주문한다. 이익을 보거든 정의를 생각하고, 위태롭거든 목숨을 버리라고 말하진 않겠다.

적어도 낮은 곳(약자와 어려운 이들)을 보고 나보다 못한 이들을 헤아려 볼 줄 아는 개념을 가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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