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 2015년 10월 14일, 파리 유네스코(UNESCO) 본부에서 중국의 저명 예술가 한메이린이 ‘유네스코 평화예술가’ 칭호를 공식 수여받았다. 이는 중국 미술계 최초의 일이다.
당일 저녁, 이리나 보코바(Irina Bokova)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직접 한메이린에게 시상했다. 보코바 사무총장은 한메이린을 ‘평화예술가’로 선정한 이유에 대해 “그는 중국에서 오랫동안 예술과 예술교육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한메이린예술기금회를 설립해 청년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제공했고, 유네스코의 이상과 취지를 실현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이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밝혔다.
한메이린은 수상 소감에서 ‘평화예술가’ 상은 영광이지만, 동시에 사명이자 책임이라고 말했다. 그는 “올해는 세계평화 70주년의 해이자 유엔(UN) 설립 70주년의 해다. 유네스코가 나 같은 미술가에게 상을 준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다. 나는 내 능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수레를 끄는 ‘소’처럼
겨울의 어느 날 오후, 기자는 차오바이(潮白) 호숫가에 위치한 한메이린예술관을 찾았다. 예술관 입구에 걸린 액자에 “너는 수레를 끄는 소다, 한평생 열심히 일하자!”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한메이린은 자신을 ‘소’라고 말한다. 그는 근면하고 성실하며 우직한 성격을 추구하고 좋아한다. 올해 80세인 한메이린은 요즘도 하루 18시간 동안 창작과 연구에 몰두한다. 이 중 4시간은 책을 읽는다. 그의 스튜디오에 놓인 탁자 위에는 첨단 과학기술의 상징 ‘3D 프린팅’을 소개하는 책에서 과거를 기록한 역사서까지, 인물 전기에서 풍경사진집까지 다양한 책이 쌓여있다. 한메이린은 “시대의 흐름을 좇아야지, 뒤떨어져선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바위 틈에서 자라난 작은 나무였다.” 한메이린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의 어머니는 본적이 저장(浙江)성 사오싱(紹興)이고 산둥(山東) 지난(濟南)의 유명한 ‘대부호’ 집안 출신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정 형편이 몰락했던 때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17살 때 우저우(五洲, 오대주)약방이라는 양약방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학교는 3년 밖에 못다녔지만 영어와 조제 약에 재능을 보였다. 아버지는 28살 때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형제 3명을 키웠다.
아침엔 밥이 없었다. 그래서 학교 가는 길에 있는 찻집에서 사람들이 안보는 틈을 타 체에 놓인 찻잎을 한웅큼 훔쳐 삼키곤 했다. 그래도 한메이린은 운이 좋았다. ‘빈민 초등학교’를 다녔지만 6개 반에 미술, 음악 선생님이 세 명이나 있었다. 학교는 공연, 미술, 노래 등 소양 교육을 중시했다. 그가 공연한 첫 번째 연극의 지도 선생은 중국 최초의 무성영화 개척자인 친훙윈(秦鴻雲)이었다. 한메이린은 초등학교 때 이미 베토벤과 모차르트의 곡에 익숙해졌고 4학년 때 <고문관지(古文觀止)>를 배웠다.
어릴적 벽과 석회가 한메이린의 종이와 먹이 되어주었다. 늘 남의 집 벽에 그림을 그렸고 특히 새로운 벽이 생기면 반드시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끌려가 꾸중듣거나 맞는 일이 다반사였다. 골목 입구의 돌길도 그림 그리기 좋은 곳이었다. 이같은 어린 시절의 ‘남다른’ 교육이 ‘무의식 중에’ 그를 예술의 길로 이끌었다.
고향인 지난 쓰마푸(司馬府)에서 멀지 않은 곳에 토묘(土廟)가 있었다. 어느 날 학교가 끝나고 장난을 치러 토지신의 유리 덮개 앞으로 가서 안을 살피다가 토지신의 엉덩이 뒤에서 ‘신대륙’을 발견했다. 거기에는 책, 인장, 조각칼, 조각받침대가 있었다. 인장 재료는 나무와 청동 등이었다. 그 뒤로 한메이린은 날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연구’가 끝나고 나서야 돌려놨다. 한메이린은 “사체(四體)천자문, 육서분류(六書分類) 같은 책이 내 인생에 영향을 주고 전서(篆書)와 만나도록 했다. 이것이 ‘천서(天書)’와 인연의 길로 이끌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1949년 4월 12일, 13살이 채 안된 한메이린은 군대에 들어가 완춘푸(萬春浦) 사령관의 통신병을 맡았다. 그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본 사령관은 그를 ‘부조(浮雕)팀’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만난 예술가들이 그의 회화에 전환점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들이 그림을 그리면 나도 그림을 그렸고, 그들이 조각을 하면 나도 조각했다. 그들이 노래를 부르면 나도 같이 노래를 불렀다.” 시간이 흘러 한메이린은 자신의 전서를 그들에게 보여주었고, 그들은 어린 아이가 이런 것을 하는 것에 놀랐다.
한메이린은 자신은 전서와 함께 미술의 길을 걸었다고 말했다. 처음 전서를 만났을 때 그는 전서를 서예가 아니라 ‘그림’으로 받아들였고, 나중에 흥미가 생기자 그것들은 뿌리 깊은 ‘이미지’로 변했다.
전각(篆刻)을 하느라 그의 손은 피부가 얼마나 벗겨졌는지 모른다. 그는 오른 손을 내보였다. 문화혁명 시기 힘줄이 끊어져 쭉 펴지지 않았다. 한메이린은 “밤에 너무 아파 잠을 못 이루면 그냥 일어나 그림을 그렸다. 예술가에게 고통과 어려움, 고난이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오히려 재산과 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찾으려 한다. 예술가는 특히 더 그렇다. 이런 탐색이 없이 그저 몇 가지 테크닉만 배워 입에 풀칠한다면 그 사람은 예술가가 아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예술가도 예술을 탐색하는 길에서 고행승이 아닌 사람이 없다. 재능이 있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이 둘이 서로 보완돼야 성공의 최고봉에 오를 수 있다. 더군다나 예술의 기준은 수학과 달라 100점이 없다”고 말했다.
삶 속으로, 이미지 속으로
1955년 한메이린은 중앙미술학원에 입학했다. 과 지도교수인 저우링자오(周令钊) 교수는 박학다식한 전문가였다. 당시 한메이린과 함께 입학한 국화(國畫)과와 조소과 학생들 중에는 서예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한메이린은 교수님에게 많은 것을 배웠다. 노동, 실습, 그림 그리기, 노래 부르기, 공연, 우표 수집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졸업한 뒤 그는 학교에 남아 대학 강사가 되었고 또 다른 새로운 길이 시작됐다.
학교에서 그는 예술 창작 이론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피력했다. “나는 예술의 길을 빙 돌아왔다. 그것을 통해 예술 이론을 보지 않고, 예술 이론은 더더욱 쓰지 않게 됐다. 나는 예술가의 창작 과정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직접 그림을 보고, 조각을 보고, 구상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실천과 생활이 없는 예술가는 창작을 논할 수 없다.” 칭화(清華)대학교 미술학원에서 교수로 있었을 때 그는 학생 선발시 전공 지식만 보고 영어 성적은 보지 않았다.
삶 속으로 들어가 예술에 가까워지기 위한 한메이린의 ‘예술 카라반’은 벌써 38년 동안이나 달렸다. 2014년 2만km, 2015년 3만5000km를 달리며 중국 곳곳을 누볐고 인도, 네팔, 아프리카, 일본까지 두루 돌았다. 그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라 깊은 산 원시림, 황토 사막을 다녔다. 그곳의 옛 문화가 그의 흥미를 끌었기 때문이다.
산베이(陝北)의 황토고원에서 한메이린은 허름한 의상의 현(縣) 극단이 공연한 <패왕별희>를 봤다. 이 공연은 예전에 그가 봤던 그 어떤 공연보다 슬프고 감동적이었다. 한메이린은 쟁반이나 그릇에 그림을 그려넣는 공장의 숙련공에게 사냥개 꼬리털로 만든 붓으로 선이 끊어지지 않는 소묘를 그리는 법을 배웠다. “정신의 승화는 반드시 생활과 현실에서 나온다. 예술가는 자신에게 이런 기회를 많이 만들어줘야 한다. 심지어 이것을 자신의 평생 사업에서 떼놓을 수 없는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 한메이린은 자신은 고향 사람들과 함께 인형을 빚고, 그림 그리고, 노래하고, 춤추고, 대화하며 같이 울어야 한다고 말했다. “나와 그들은 불가분의 관계다. 내 작품에는 슬픔이 없고 하소연이 없다. 중화민족이 아무리 상처 입고 약탈을 당해도 21세기 우뚝 서 당당하게 세계 선두가 된 것처럼 말이다.”
‘문화대혁명’ 후기부터 늘 전서를 연구한 그는 ‘하느님의 문자’, 즉 상형문자와 그림문자를 수집했다. 이후 그는 카라반으로 고문화의 발자취가 있는 전국 각지를 찾아가 ‘천서(天書)’를 수집했다. 2007년 30여 년 동안 수집한 것을 정리해 3만여 자 분량의 ‘천서’를 출간했다. “그렇게 반응이 좋을 줄 몰랐다. 이런 고문자책은 보통 수백권도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은 4만권이 팔렸다. 일본에서 출간했을 때는 하루에 다 팔렸을 정도다.”
“천서는 우리에게 ‘개괄’이라는 두 자를 알려주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개괄’된 예술, 수필, 기품을 깨닫게 했다. 이런 극도의 ‘개괄력’이 ‘전형적인 것을 추출’하는 능력에 영향을 주었다. 말(馬) 같지 않은 말, 양 같지 않은 양에서 보여진, 문자와 그림 사이의 이미지가 나를 풍부하게 했고 충만하게 했다.”
이런 고문자 유산을 수집하면서 한메이린은 암벽화도 수집했다. 하지만 그는 문자나 그림으로 수집한 것이 아니라 이것들을 상형문자와 기록의 그림으로 삼았고, 동시에 이것들을 ‘이미지’로 전환시켰다. 암벽화 창작은 그의 예술을 전통적이면서 현대적인 방향으로 또 한번 전환시켰다.
동양의 피카소가 아닌 ‘중국의 한메이린’
국화, 서예, 전각, 날염, 도자, 조소까지 아우르는 한메이린은 그래서 자신을 ‘잡종군(軍)’이라고 부른다. 한메이린은 “이미지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재료는 문제가 아니었다. 예술은 ‘수단을 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예술의 이미지뿐 아니라 예술 형식, 예술 수단 및 예술 방법도 포함한다. 예술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고 이는 사람들의 말문을 막히게 하고, 이유를 모르게 하며, 안절부절하게 만들고, 초조하게 하며, 넋이 나가게 한다”고 말했다.
그를 ‘동양의 피카소’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이 말에 반대하면서 “나 한메이린은 유럽이 아닌 중국이 배출했다. 자존심을 걸고 말하건데 나는 ‘중국의 한메이린이지 피카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동양과 서양 예술은 다르다. 유화는 숨을 밖으로 내뱉지만 반대로 서예는 숨을 참는다. 암벽화, 서예, 광초(狂草, 초서의 일종), 갑골문, 천서를 현대의 심미관을 통해 내뱉으면 현대적이다.”
현재 한메이린예술관은 항저우(杭州), 베이징(北京), 인촨(銀川) 3곳에 있다. 당대 예술가 가운데 3개의 개인 예술관을 보유한 예술가는 많지 않다. 올해 한메이린은 중국 국가박물관에서 ‘80대전(大展)’을 가질 예정이다. 국가박물관 8개 홀에서 그의 최신 역작을 전시할 예정으로 이는 신중국 성립 이후 중국 예술가로서는 최대 규모의 전시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마스코트인 푸와(福娃), 중국국제항공의 불타는 봉황 로고, 수십 미터 높이의 도시 랜드마크 조각 50여 개를 제작했다. 어떤 이는 한메이린의 일생에 대해 ‘공도 세우고 이름도 날렸다’고 하지만 그는 자신의 창작에 여전히 큰 공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평화예술가 상’을 받은 지 3일째 되는 날, 한메이린은 항저우의 자택으로 돌아와 자신을 집에 가두고 정부기관 관계자, 기자들을 일체 만나지 않았다. 대신 단숨에 200장이 넘는 그림을 그렸다.
한메이린의 학생이 된다는 것은 때로는 매우 ‘괴롭다’ 그는 늘 새로운 창작 영감이 떠올라 오전에 그린 것과 오후에 그린 것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인생에서 3가지를 꼭 기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첫째, 사람이 돼야 한다. 사람이 안 되면 어떤 것도 논할 수 없다. 둘째, 생존 능력이다. 이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세상에 대한 공헌이다. 한메이린은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모든 사람은 존엄하다. 국가는 국가의 존엄이 있고, 민족은 민족의 존엄이 있어야 한다. 개인도 자존심과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담담하게 세상을 살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의 주인이다. 나는 이 세상에 요구만 하지 않았다. 적어도 나는 이 세계에 공헌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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