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과자를 제가 배달해드릴 테니 대금은 보름 후에 주세요.”
해방 후, 38선으로 남과 북이 나뉜 직후였다. 함흥에서 왔다는 젊은이는 한 마디로 외상거래를 제안했다. 상인으로서는 보름 동안 돈을 돌려 쓸 수 있으니 조건이 나쁘지 않았다. 젊은이는 그 날부터 그곳에 과자를 공급할 수 있었다.
타향에서 자전거 한 대로 사업을 시작한 젊은이. 주인공은 바로 서남(瑞南) 이양구 동양그룹 창업자였다. 남한에서 최초로 외상거래를 도입한 서남은 이를 ‘수형거래(手刑去來)’라 이름 붙였다. 판매 전략이 남다른데다가 성실함과 근면함을 인정받아 거래선은 날로 늘었다. 그렇게 1년간 모은 600만 원으로 서남은 동양식량공사를 설립해 1950년 한국전쟁 직전까지 자본금 10억 원의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나 전쟁이 나면서 모든 것이 날아갔다.
부산으로 피난 간 서남은 설탕 도매업을 시작했다. 15세 무렵 고향인 함흥의 식료품 도매상 사환으로 일하면서부터 몸에 밴 정직과 신용 덕분에 사람들은 그와 한 번 거래를 시작하면 거래처를 바꾸는 법이 없었다. 사업은 다시 빠르게 번창했다.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와의 인연으로 서남은 제일제당이 생산한 설탕을 독점 판매했다. 전쟁 후 과자와 커피를 비롯한 기호식품 소비가 늘어나면서 설탕 수요도 급증했다. ‘한국정당판매주식회사’를 세우며 사세를 더욱 키웠다. 이 때 사람들은 그를 ‘설탕왕’이라 불렀다. 1956년에는 풍국제과를 인수해 ‘동양제과’로 이름을 바꿨다.
설탕과 과자 판매로 기반을 잡은 서남은 1957년 삼척세멘트(현 동양시멘트) 인수를 추진했다. 삼척세멘트는 당시 남한내 유일한 시멘트 공장이었으나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가동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인수자금 부담은 물론 대규모 추가 투자가 필요해 민간기업이 맡기에는 위험도가 큰데, 시장에는 외국에서 수입하거나 원조 받은 시멘트가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에 판로도 부정적 전망이 컸다. 동업자들이 손을 때겠다며 강렬히 반대했다.
서남의 생각은 달랐다. 삼척은 풍부한 자원과 삼척화력발전소로부터의 동력을 쉽게 확보해 대량생산이 가능하고 바다를 끼고 있어 해상운송의 편리하다는 이점을 살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멘트 사업을 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남을 이롭게 하고, 자기가 속한 사회에 공헌해야만 하는 것이 사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자신의 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서남은 “사회 전반적인 차원에서도 무언가 공헌할 수 있는 그런 업종은 없을까 하는 걸 늘 생각해 왔다. 도로와 항만 그리고 전후 폐허가 돼버린 주택 등 모든 분야에 시멘트는 필수불가결의 상품이었다. 나는 만 가지 어려움(萬難)을 배제, 이를 위해 생애를 바치는 데 조금도 후회가 없음을 자신했다”고 말했다.
회사를 인수한 서남은 민간기업 최초로 DFL(미국의 유상원조) 차관을 받아 낙후 시설을 교체하고 설비를 증설했다. 업계 생산과잉 및 경기 위축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자 시멘트 수요가 급증하면서 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서남은 생전에 “인간에게는 모든 것을 종합하는 조화의 능력이 있다”, “기업은 오케스트라와 같다” 등의 지론을 펼쳤다. 그는 회사 모든 임직원이 서로 협력함으로써 회사를 평화롭게 발전시켜나가기를 희망했고, 서로 인간적으로 의지가 되는 회사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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