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리잉(李穎) 기자 = 베이징(北京)과 상하이(上海)의 유명세에 비해 광저우(廣州)는 ‘천년 도시’ ‘국제 도시’같은 무거움이 없고 재기발랄하고 적극적인 모습이 많다. 정이 넘치지만 소란스럽지 않고 참신하지만 가식을 떨지않아 유유자적한 느낌을 준다. 전통유산 보호든, 신흥문화의 실천이든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는 도시가 광저우다.
앞서가는 도시에서 느끼는 옛 정취
광저우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지만 근현대에 갑자기 빛을 발해 두 차례나 중국이 세계를 보는 ‘창구’가 됐다. 첫 번째는 1911년 신해혁명의 발단이었다고 평가되는 ‘황화강(黃花崗) 사건’이고, 두 번째는 1980년대 개혁개방의 물결이다. 때문에 광저우는 사람들에게 현대적 이미지로 새로운 물결을 만들어 나간다는 인식을 주었지만 때론 이것이 오히려 광저우를 오해하는 선입견을 만들기도 했다. 흥망에도 동요하지 않고 큰 변화가 없는 광저우의 ‘옛 지역’을 거닐다 보면 이 도시의 눈부심과 고요함 외의 ‘본색’을 더 잘 알 수 있다.
천자츠(陳家祠), 황푸(黃埔)사관학교, 중산(中山)대학, 이 세 건축물은 광저우의 전통적인 성격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오전 9시, 천자츠 지하철역. 이 ‘광저우의 명함’은 다른 대도시의 상징적인 건축물처럼 요란하지는 않지만, 이 3진(進) 3로(路) 6원(院) 8랑(廊)의 민간 사당식 건축물은 대문의 용마루에 놓인 벽돌 조각인 전조(磚雕)만 봐도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천자츠는 당시 광저우의 유명 건축가인 리쥐촨(黎巨川)이 설계했고 각 분야에서 제일 실력있는 장인들이 공사에 참여해 장장 7년의 세월 끝에 1894년에야 완공됐다. 청나라 때 가장 화려했던 링난(嶺南)지역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라고 할 수 있다.
황푸사관학교는 현지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 시대와 정세의 선택이었다. 1924년 황푸사관학교 부지로 이곳이 선정됐다. 같은 해, 손중산(孫中山, 손문)이 광저우에서 근대 교육 모델을 실천하는 우수한 학교를 통합해 신식교육을 실시하는 대학을 설립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지금의 이름으로 바꿨다.
교내로 들어가면 이셴로(逸仙, 이셴은 손문의 호)가 남북을 관통하고 이 길을 따라 독특하고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다. 손중산이 직접 쓴 10자로 된 교훈, 중국 최초의 벽돌과 철근콘크리트 혼합구조 건축물인 마딩탕(馬丁堂), 98년 역사를 가진 미국식 석조건물인 화이스탕(懷士堂), 명나라 숭정(崇祯) 8년(1635년)에 세워진 을축진사패방(乙醜進士牌坊, 원래 광저우 쓰파이러우(四牌樓)에 있었음), 천인커(陳寅恪) 옛집 등이 있다. 이런 아름다움과 무게감을 지닌 길은 광저우에서 이곳이 유일하다.
두 시대가 담겨있는 둥산(東山)
20세기 말, 미국인 기독교 전도사가 둥산을 근거지로 삼았다. 서양인이 거주했기 때문에 시관다우(西關大屋)의 탕룽문(趟栊門)과는 전혀 다른 서양식 다층건물이 지어졌고, 조용하던 둥산이 ‘서양 신사’의 모양을 점차 갖추게 됐다. 이후 귀국한 교포와 관리들까지 이곳에 거주하면서 ‘돈 있고 세력 있는 사람은 둥산에 산다’는 말이 생겨났다.
오르막길을 따라 작은 언덕을 올라가면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물결이 만들어낸 떠들썩함이 점점 멀어지고 속세의 냄새와는 다른 고귀함과 도도함이 느껴진다. 널찍한 아스팔트 도로가 점점 좁아지면서 벽돌과 모자이크가 시작된다. 모퉁이서부터 교정의 붉은 담이 시작되고 높이가 다르고 외관도 가지각색인 양옥집들이 하나 둘 나타나 길 하나를 사이로 주택의 모습이 전혀 달라진다.
지난 2005년 광저우는 행정구역을 조정해 둥산은 웨슈(越秀)구로 편입됐고, 대부분의 ‘둥산 도련님’들도 구역 조정에 따라 광저우 각지로 흩어졌다.
례더쯔(獵德仔)는 최근 새롭게 나타난 단어다. 톈허(天河)구에 위치한 례더(獵德)촌은 둥산구와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원래는 농민의 자가건축이 밀집된 것으로 유명한 ‘도시 속 마을’이었지만 주장(珠江) 신도시 건설로 농민 벼락부자가 많이 탄생했다.
최근 광저우의 결혼적령기 여성들이 제일 많이 듣는 말은 “례더쯔를 잡아라”라는 말이다. ‘쯔(仔)’는 광둥에서 젊은 남자를 일컫는 말이다. 맞선 테이블에서 례더 사람의 ‘일례’가 전해진다. 가령 례더촌 사람이 차를 사면 자동차 판매점을 거덜낼 수 있다, 례더 새집에 들어가면 800테이블의 연회석을 볼 수 있다. 이 곳에 손님을 초대해 음식을 접대하면 신문에 날 정도다. 그래서 “례더쯔에게 시집가면 세상에 걱정할 게 없다”는 것이다.
전통의 둥산과 신흥 례더는 서로 다른 이야기와 시대의 흐름, 가치관을 보여준다.
어디서 샤오저우(小洲)를 찾을까
샤오저우는 광저우 도시 속 마을 중에서 가장 특수한 곳이다. 샤오저우는 광저우미술학원(廣州美術學院, 이하 미술학원)의 ‘뒤뜰’이었다. 현지 언론의 열띤 보도로 유명해져 ‘광저우에서 가장 잠재력 있는 문예 생활 마을’이라고 불렸다.
2003, 2004년, 미술학원 교수와 예술 애호가들이 샤오저우촌에 입주했다. 그중에는 탄톈(譚天), 인딩방(尹定邦) 같은 문화계 유명인사도 적지 않았다. 2008년 언론 보도로 샤오저우촌은 하루아침에 유명해져 광저우 문화 예술 청년들의 성지가 됐다. 이곳은 미술학원과 가깝고, 환경도 좋으며, 휴대전화 신호도 잡히지 않고, 주변에 뜻이 맞는 사람만 있어 마치 유토피아 같았다. “그때가 샤오저우촌의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샤오저우촌에서 7년째 살고 있는 예술 애호가 자오신(趙欣) 씨는 이렇게 말했다.
샤오저우같이 오래된 마을을 보호하는 일은 언제나 일종의 게임같다. 이후 샤오저우는 미친듯이 확장 건설됐고 미술학원 응시생들이 몰려들었다. 2011년에서 2013년이 최고조였다. 당시 샤오저우의 미술학원 응시생 숫자만 1만5000명이 넘었다. 걸어서 20분이면 한 바퀴를 도는 작은 마을에게 이는 놀라운 숫자였다. 때문에 샤오저우촌은 개축과 확장을 거듭했고 자연히 임대료가 10배 가량 올랐다. 환경과 거주 조건이 변하자 예술가들이 마을을 속속 떠났고 이에 따라 응시생도 급감했다.
40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젠(簡)씨 다쭝츠(大宗祠, 사당)도 아직 남아 있고, 명나라 때의 한모차오(翰墨橋)도 아직 건재하며, 유명한 하오커우(蚝殼屋)도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지금의 샤오저우촌은 예전과 많이 달라보인다.
그래도 샤오저우촌이 있어서 다행이다. 모든 삶이 토대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샤오저우촌은 지리적 환경적으로 여전히 미술학원의 가장 훌륭한 뒤뜰이고 자오신 씨처럼 떠나지 않은 사람도 여전히 많다. 그들은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이곳에서 환경에 맞게 살아가면서 창작에 몰두하거나 사업기회를 포착하고 있다. 그들에게 샤오저우촌의 변화는 일시적인 것이고 샤오저우의 본질과 속성은 여전히 깨끗하고 소박한 것이다. 샤오저우는 여전히 스스로를 돌보는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고, 이는 내실을 추구하는 많은 광저우인들의 모습과 같다.
‘칸톤 타워(Canton Tower)’ 등 광저우의 다른 볼거리
5년전 공식 개장한 ‘칸톤 타워’ 광저우 타워는 눈에 띄는 광저우의 랜드마크가 됐지만 인문적인 측면에서 보면 매혹적인 외관의 이 새로운 건축물은 광저우를 다 표현할 수 없다. 이 도시의 진면목과 현지인의 정서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것은 오래된 상업중심지인 베이징루(北京路), 옛 광저우의 삶의 운치를 담고 있는 상샤주(上下九), 상주루(上九路)와 샤주루(下九路), 새롭게 나타난 ‘도시 응접실’인 주장 신도시, 세계적인 연극이 상연되는 광저우대극장 등이다. 이것들이 현지인이 생각하는 광저우의 진면목으로 광저우인의 독특한 삶의 품격을 잘 보여준다.
굽이져 흐르는 냇물은 푸르고, 강 양쪽의 리즈(荔枝)는 붉다. 이것은 광저우의 리즈만(灣)을 일컫는 말로 리완(荔灣)구의 이름도 여기서 유래됐다. 사실 리완에는 ‘만(灣)’이 없다. 오랜 세월 동안 이곳은 옛 가옥이 밀집했던 곳이었다. 1999년, 리완구 정치협상회의는 ‘리즈만 옛 길 복원’에 관한 안건을 내놓았고 10년 뒤 시행돼 지금의 리즈만은 푸른 물이 흐르는, 가장 광저우다운 모습으로 옛날의 분위기와 기억을 되살려 놓고 있다.
‘허난(河南)’의 장난시루(江南西路)는 광저우 젊은이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허난’은 간단하게 주장 남쪽이라고 보면 된다. 강을 따라 주택가가 있고 중산대학, 광저우미술학원 등 예술적 분위기가 흐르는 문화와 교육의 지구다. ‘허베이(河北)’의 분주한 모습과는 달리 ‘허난’은 조용하고 도도한 광저우의 또 다른 얼굴이다.
1888년 광저우에 58.5m 높이의 고딕양식 성당인 ‘스스(石室)’가 들어서면서 당시 광저우인들에게 시각적 충격과 문화적 전율을 느끼게 했다.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렇다. ‘스스’는 광저우의 전통적인 부자동네와 멀지 않고, 탕룽먼이 달린 시관다우와 멀리서 마주하고 있다. 서양 교회의 뾰족한 두 개의 탑은 서양 예술을 보여줬을 뿐 아니라 광저우에게 종교, 건축, 문화를 선택할 수 있는 자주권도 주었다.
바이윈(白雲)산은 광저우인의 마음 속에서 대체 불가한 랜드마크다.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광저우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바이윈산에 대한 존중은 지극하다. 광저우 공항이 바이윈산에 있지 않음에도 ‘바이윈’이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니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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