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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위대한 문학가 궈모뤄와 조선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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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6-02-03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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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학가 궈모뤄[사진=바이두]


<안후이〈安徽〉대학교 외국어교육부) 쑹원징(宋文靜) 기고>
궈모뤄(郭沫若)(1892-1978)는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문학가, 극작가이자 시인이다. 중국문학계의 거장인 그는 조선과 한 차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는 중국에 일본 유학 열풍이 불며 서양보다 동양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여긴 많은 중국인들이 구국구민(救國救民)의 길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 일본 유학을 결심하게 된 궈모뤄는 1914년의 마지막 날 베이징에서 경봉(京奉)철도를 타고 일본으로 향할 당시, 조선을 경유하며 조선에 수일을 머물렀다. 궈모뤄는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첫 문학작품인 단편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를 발표한다.

근대에 이르러 중국과 한반도는 일본 제국주의를 비롯한 제국주의의 침략에 무참히 짓밟혔다. 양국에서 각각 항일 구국운동이 전개되는 가운데 항거운동에 얽힌 많은 일화도 생겨나게 되었다. 하루 빨리 침략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를 바랐던 양국민들은 민족을 멸망의 길에서 구하고 생존을 향해 싸우는 상대방에게 많은 관심과 지지를 보냈다. 궈모뤄가 공개 발표한 첫 문학작품인 『목양애화』 역시 일본의 침략을 당한 조선을 배경으로 쓰였다. 궈모뤄는 일본 침략자들의 핍박에 시달렸던 조선인들의 참혹한 모습을 목격하고 이들에 대한 동정과 지지, 조선이 겪었던 역사와 반일(反日)정서를 바탕으로 이 작품을 써 내려갔다.

『목양애화』는 1919년 잡지 《신중국(新中國)》에 발표되었다. 소설은 중국인인 ‘나’의 시각으로 항일운동과 비련, 망국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는 조선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다. 금강산을 지날 때 마을 주민인 부녀자 윤(尹) 씨는 ‘나’에게 양치기 소녀 민패이(閔佩荑) 일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 말기, 간신들은 일본과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하려 하고 애국충신 민숭화(閔崇華)는 연일 조약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리며 조정에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리라고 간한다.

하지만 상소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심한 민숭화는 일가를 데리고 조정을 떠나 시골에 은거한다. 민숭화의 본처는 무남독녀 민패이를 남기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윤 씨와 그녀의 남편 윤석호(尹石虎)는 민 씨 일가의 노비로서 윤자영(尹子英)이라는 아들을 두었는데, 훗날 장성하여 민 씨 일가의 양치기가 된다. 민숭화는 윤자영을 몹시 아껴 그를 ‘아들’이라고 부르곤 했다. 윤자영은 민패이보다 한 살이 많아 어릴 적부터 서로 친하게 지내며 자랐다.

민숭화의 후처인 이 씨는 명문가 규수 출신으로 일본 유학과 구미 지역 대도시를 여행했던 경험이 있고 경성(京城) 사교계에서 이름난 여인이었다. 은둔생활을 달갑지 않게 여겼던 이 씨는 민숭화에게 불만을 품고 늘 번화한 경성으로 돌아갈 궁리만 했다. 결국 이 씨는 민숭화가 쓴 반일 시를 발견하고 윤석호와 모의하여 민 씨 부녀를 살해하고 일본에 아첨하여 출세하기를 꾀했으나, 이 같은 사실이 자영에게 발각된다. 자영은 민숭화와 패이를 지키기 위해 고의로 친아버지에게 살해를 당한다.

윤석호는 자신이 아들을 죽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길로 집을 떠나 종적을 감춘다. 낯을 들 수 없었던 이 씨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비탄에 잠긴 민숭화는 머리를 깎고 중이 된다. 홀로 남겨진 패이는 구슬프게 양을 모는 노래를 읊조리며 마음에 품었던 이가 생전에 돌봤던 양떼를 기른다. 주인을 잃은 양들은 풀을 먹으려 하지 않았고, 몇 년이 지나자 그만 절반이 죽어버린다. 상심한 패이는 자영의 무덤 앞에 양들의 무덤을 만들어 준다.

문학번역가 량바이화(梁白華)는 1932년 이 작품을 『금강산애화(金剛山哀話)』라는 제목으로 번역해 월간지 《동방평론(東方評論)》을 통해 조선에 소개했다. 이 점으로 미루어 『목양애화』가 항일투쟁 시기 이미 조선문학계의 주목을 끌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소설은 마지막에 생동감 있는 필치와 애달픈 목소리로 “이 애끊는 마을과 상심의 땅에서 그 누가 목석같은 마음으로 한 순간이나마 머무를 수 있겠는가?”라며 일본 침략자들의 잔혹한 핍박 속에 기울어 갔던 조선시대의 참상을 묘사했다. 이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 침략을 고발함과 동시에 조선인들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표현했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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