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세계무역기구 정부조달협정(WTO GPA)’이라는 제도가 있다.
WTO GPA 가입 국가들은 중앙정부·지방정부·공기업 등 관련기관의 발주 공사입찰에 동등한 조건을 부여해 시장진입의 장애요소를 철폐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국교단절 등의 정치적인 이유가 있더라도 가입국간에는 입찰 참여가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 정부는 1994년 WTO GPA에 가입했다. 이를 통해 국내기업의 해외진출에 크게 기여를 한 것이 사실이다. 주목할 점은 협정에 가입했다는 것은 회원국이 양허한 만큼 우리도 국내 발주 물량도 문호를 개방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양허 대상에 철도산업이 포함됐다.
◆중앙·지방 공기업 모두 개방
다자간 통상교섭인 WTO와 양자간 교섭인 자유무역협정(FTA) 체제에 부응하기 위해 통상 부문의 개방 확대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다만, 국내 철도차량산업이 처한 상황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배려했다면 어느 정도 보완책을 마련할 수 있었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철도차량산업은 막대한 자본과 기술이 요구되는 국가기간산업이다. 철도차량은 다른 수송기관과 달리 철도 선로 위에서만 주행하고, 차량부품 또한 그 철도차량에만 소요되는 것이므로 철도차량 부품에 대한 수요도 기본적으로 철도라는 사회간접자본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 가장 큰 특징은 철도차량 및 부품산업은 주문생산 및 다품종 소량생산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주문과 입찰에 의해 시장이 형성되므로 수주를 해야 일감을 얻을 수 있다. 이러다보니 사전 계획 생산 및 납기 조정이 어려우며, 가격을 인하해 수요를 증가시킬 수도 없다. 규모의 사업을 전개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산업의 경쟁력을 좌우한다.
그런데, 한국 철도차량의 시장 규모는 연간 5000억~6000억원 수준으로 전 세계 철도차량 시장 규모인 약 72조원의 1%도 미치지 못한다. 규모의 사업을 전개할 수 없다.
시장이 작으니 철도·부품기업들의 기술개발 투자 여력이 충분하지 않고, 인력 양성이 어렵다. 시장의 변동성이 커 업체들의 경영 상황이 타 산업에 비해 불안하고 실제로 악화 상태인 경우가 많다. 철도차량산업에 참여하고 있는 전체 기업의 95% 이상이 종사자 수 50명 이하의 중소·영세업체라는 점이 이를 반증한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생산하는 철도차량 모델수가 많은데 발주는 소량이며, 이 또한 발주가 불규칙적으로 이뤄지는 등 다양한 문제점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다.
◆운영사의 경영악화도 산업 발전 걸림돌
철도차량의 고객인 철도 운영사들의 경영환경 악화도 주목해야 한다. 철도 이용요금이 서민 물가에 직접 연관되는 관계로 요금인상은 되도록 억제되는 바람에 투자금 회수 및 운영비용 확보가 여의치 않다. 20년 이상 사용한 낡은 철도차량 교체비용도 마련하기 쉽지 않은데다가, 정부로부터 신규 노선에 투입되는 철도차량 구매 시에만 40~60%의 국고를 지원받을 수 있고, 교체차량은 자체 자금으로 확보해야 하기 때문에 비용 부담이 크다.
결국 오래된 객차를 운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으나 이 또한 고민이다. 철도 운영사는 해가 갈수록 차량유지보수 비용 증가 부담이 크다. 철도차량 및 부품업체들도 철도 운영사들에게 공급할 소모품 등 관련 부품을 수 십 년간 생산해야 하기 때문에 생산설비를 유지하고 재고를 안고가야 하는 부담 또한 크다. 특히, 오래된 철도차량을 장기간 사용할 경우 좁은 시장에서 새로운 기술을 적용하기가 어려우므로 기술 경쟁력 약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정부가 철도차량 산업을 WTO GPA 양허대상에 포함시킨 것이다. 철도차량의 반대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WTO GPA 협상 당시 철도차량 개방건은 회원국간 협의사항이었을 뿐 정부가 업계의 의견을 반영한 것은 거의 없다”면서 “산업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우리는 그저 ‘원 오브 뎀(협상 타결을 위해 제시한 카드 중 하나)’였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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