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한국의 여성 최고경영자(CEO) 1호로 손꼽히는 장영신 애경그룹 회장은 국비장학생으로 미국 유학길에 올라, 필라델피아 체스넛힐대학(Chesnut Hill College)에서 화학을 전공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여성 엘리트다.
채몽인 애경그룹 창업자와 결혼 후 평범한 주부로 살던 그의 인생이 뒤바뀐 것은 1970년 7월12일 남편이 갑작스럽게 별세하고 부터였다. 국내 최초의 미용비누 ‘미향’에 이어 국내 최초의 주방세제 ‘트리오’로 빠르게 사세를 확장하던 상황에서 창업자의 별세는 회사의 존립을 흔드는 위기였다.
처음에는 ‘네 명의 아이들을 어떻게 하나. 잘 키워야 할 텐데’ 하는 걱정이 앞섰다는 장 회장.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남편이 키워낸 회사를 두고만 볼 순 없었다. 창업자 타계 1주기를 맞아 회사경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그는 6개월간 남몰래 종로 낙원동에 있던 경리학원에 가 복식 부기, 재무제표 보는 법 등을 배웠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시작해 회사를 그만두겠다는 극단적인 태도를 보이는 임원도 있었던 것. 이들 가운데 실제로 적지 않은 회사 사람들이 같이 일해 달라는, 최소한의 수준까지만 가르쳐달라는 장 회장의 부탁을 외면한 채 애경을 떠났다.
장 회장은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당시 심정을 이렇게 전했다. “나도 내 자신의 능력에 대해 전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 상황으로 볼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모성에서 출발했고, 남편의 유업을 그냥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에 대한 책임감 등이 복합돼 운명적으로 기업경영을 맡아야겠다는 오직 한 가지 생각에서 무모한 모험을 시작한 것이다.”
1972년 7월 1일, 첫 출근한 장 회장은 한달 후 대표이사에 취임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숨겨왔던 승부사의 기질을 발휘했다. 남편이 키워온 비누사업을 유지하되 미래 애경의 지표를 화학공업으로 설정했다. 그해 말 1차 오일쇼크가 터질 당시, 세탁기가 보급되기 시작할 때여서 비누 대신 합성세제 시대가 도래할 것으로 예견하고 대덕에 2500여 평 규모의 대규모 합성세제 공장을 지은 것이다.
1975년 공장이 준공될 무렵 합성세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플라스틱 용기류를 생산하는 성우산업을 출범시켰고, 폴리에스테르 수지를 제조하는 애경화학, 합성세제 원료를 생산하는 애경쉘, 도료 메이커인 애경공업, 애경유지의 사업을 그대로 이은 애경산업 등을 차례로 설립해 규모를 키웠다..
1980년대 들어 화장품 사업에 뛰어들 당시에는 관심이 저조했던 ‘클렌징’ 제품 시장을 주목하고 백화점과 호텔, 전문매장에서만 살 수 있었던 유통구조를 개혁해 약국과 슈퍼마켓에서 판매해 대성공을 거뒀다.
“차별과 편견은 세상으로 나가는 통과의례”라고 입이 닳도록 말하던 장 회장은 소비자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고, 이에 부합하는 제품을 연이어 출시해 그들의 마음을 얻었다.
혹독한 입문 과정을 거친 장 회장은 작은 비누회사였던 회사를 2015년 기준 국내외 46개 계열사를 거느린 연매출 6조원의 ‘애경그룹’으로 성장시켰다. 또 여성기업인을 위한 제도적 장치 마련에도 앞장서는 등 여성의 능력을 개발하고 사회적 지평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장 회장은 “나를 여기까지 이끈 힘은 죽을 만큼 힘든 순간에도 결코 포기하지 않은 미련한 인내심이었다”고 후배 기업가들에게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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