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으로 향하긴 했지만 중국에 온통 마음을 준 건 아니라는 점을 미국에 보여주고 싶은 듯했다. 마침 선글라스는 박 대통령의 시선이나 표정을 적절하게 가려주고 있었다. 이왕 갔으니 흔쾌하게 일어서서 박수치고 손 흔들고 그랬으면 어땠을까.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겠지만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정쩡한 한국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당시 필자는 이 칼럼에서 박 대통령이 열병식 바로 다음 달 열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서 “한반도 평화를 위해 열병식에 갔노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를 주문했다. 그의 결정이 옳았다는 걸 ‘답례품’을 통해 보여주는 건 시 주석 몫이라고도 했다. 자칫 빛이 바랠 뻔했던 전승절 행사에 화룡점정 효과를 안겨준 이가 박 대통령 아니었던가. 미국의 핵심 동맹국 지도자 가운데 유일하게 열병식을 참관했으니.
북한의 핵 야욕 과시 뒤 주변 강대국 움직임이 바쁘다. 동북아 국제질서가 흔들리는 상황이니 당연하다. 미·중 주도로 유엔 대북제재 결의안을 마련하자 러시아가 존재를 드러내 보였다. 이번에도 큰 기대를 걸었다간 실망하기 십상이다. 전례 없이 강한 제재를 담았다곤 하지만 중국의 요구로 “북한 주민의 생계를 위협해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었다. 러시아도 막판에 일부 제제 완화를 반영시켰다.
미·중 양국은 지금까지 ‘통제 가능한 범위 내 한반도 긴장 상태’라면 자국의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나쁠 게 없다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급격한 혼란이나 상황 변화보다는 현상 유지가 서로에게 부담이 없다는 계산을 했다. 대북 제재,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평화협정 등을 놓고 미·중이 의견 조율을 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한반도에서 위기가 고조될수록 강대국들은 이곳에서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더욱 기를 쓰고 달려든다는 사실이다. 한 국가가 혼란에 휩싸이거나 쇠퇴기에 접어들었을 때 외세가 개입할 기회가 커지는 건 동서고금을 통해 드러났고, 지금도 목격하고 있는 대로다. 남남 사이는 물론 남북한 간 갈등이 악화될수록 통일의 기회가 눈앞에 어른거려도 이를 잡지 못하게 될 뿐이다.
지금 최고조에 이른 남북한 간 긴장 관계조차 통일로 가기위한 과정이라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북한은 지구상에서 사라져야할 나라라는 대응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냉전적 대결 구도를 강화해서는 통일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다. 중국을 북한 편에 더 가까이 가도록 유도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130여년전 청나라 외교관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렸던 일이 떠오른다. 조선책략은 "조선은 미국과 연합하고(연미국·聯美國) 일본과 협력하며(결일본·結日本) 청나라와 친하게 지내야 한다(친중국·親中國)"고 강조했다. 러시아의 남진정책으로 청나라가 위협을 받자 미국을 한반도에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하는 의도를 숨긴채. '결일본'을 권고한 것은 청나라로선 일본을 경계하면서도 러시아를 막기위한 고육책이었다.
국제 정세를 청나라에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의도였지만 조선은 그들의 속셈을 읽을 능력조차 없었다. 외세 배격파와 개화파로 국론이 분열돼 갈팡질팡했다. 영남 유생들은 일본과 손을 잡는건 어불성설이라며 상소문을 올리기도 했다.
이제 평화협정에 대한 진지한 검토는 필요하다고 본다. 물론 북한과 중국이 평화협정 뒤에 깔아 놓은 복선을 모르는 바 아니다. 북한이야 북·미 관계 정상화, 주한 미군 철수, 핵 보유국 인정 등을 성취하고 싶을 거다. 중국으로선 이 과정에서 동북아 정세 주도권을 미국에 빼앗기지 않고 유지할 수 있다는 심산이다.
하지만 한반도 평화와 통일로 가는 기나긴 여정은 평화협정 논의부터 시작돼야 한다. 왜 그럴까. 한반도 통일이 가능한 상황을 생각해보자. 다른 조건도 충족돼야 하지만 미국이나 중국 등 주변 강대국들이 남북한 통일이 자신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야 한다. 한반도에 들어설 통일 정부는 친미도, 친중도 아니라는 믿음을 주도적으로 심어주는 건 우리의 역할이다.
(아주경제 중문판 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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