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시립대학(CUNY)에서 교환교수로 재직중인 전남대학교 김재기(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29년 당시 미주한인 신문이 광주학생독립운동을 100회 이상 보도하면서 이를 ‘제2의 3.1운동’으로 평가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이 자료는 북미대한인국민회총회(회장 백일규) 기관지인 ‘신한민보’가 1929년 11월부터 1932년까지 2년 동안 발행한 신문을 분석해 밝혀 낸 것이다.
미주에서 발행된 신한민보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국권회복을 위해 창간한 ‘공립신보’의 후신으로 1909년부터 신한민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했다.
1930년 5월 1일자 신문에는 상해임시정부 김구 주석이 대한인국민회 백일규 총회장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를 게재했다.
신한민보가 보도한 이 편지는 상해임시정부의 김구주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해 직접 언급하며 높게 평가한 최초의 문건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신한민보는 이와 함께 미주에서 대한인국민회의가 주도하는 ‘광주학생운동후원공동회’ 조직과 ‘광주학생지지대회’ 및 ‘후원금 모금활동’을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Korean National Association)는 1909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박용만, 이승만, 안창호 등에 의해 창설된 미국내 독립운동단체이다.
신한민보는 1930년 3월 6일자에 미주지역 3.1만세운동 11주년 기념행사를 전면에 보도했다. 1면에 “미주 각처 동포들의 3.1기념대성황, 학생운동을 후원 절대 필요를 역설”이라는 제목으로 대한인국민회 주최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응원회와 함께 공동으로 미주 전역에서 진행한 내용을 자세하게 보도했다.
신한민보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첫 보도는 1929년 11월 28일자 1158호로 “흥분된 천여학생 시위행렬, 광주고보생을 필두로 농업생도 대막대를 메고 시위 행진을”이라는 제목으로 이뤄졌다.
신문은 이 기사에서 “지난달 3일 광주고등보통학교(조선인 학교) 학생과 광주중학교(일본인 학교) 학생 각각 수 백명이 광주역 부근에서 일대 충돌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학교당국은 3일간 휴교령을 내렸다.”고 해외에서는 처음으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보도했다. 이 기사는 중국의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에서 1929년 12월 12일, 소련 극동지역에서 발행된 ‘아방가르드(선봉신문)’ 12월 29일에 보도된 것보다 한 달 정도 앞선 보도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29년 12월 12일자에는 “조선학생 경관과 충돌”이라는 제목으로 광주에서 서울로 확산된 사실을 보도했고, 1930년 1월 2일자에는 “4종 격문확대로 127명 검거하여 종로서에 연행”이라는 기사를 비롯해 ‘배재고보 학생 검거’ 등 6건의 소식을 게재했다.
신한민보의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보도는 1930년 5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1931년 7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성진회사건 판결’로 “광주학생 85명중 69명이 출감했다” 는 보도까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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