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연원을 찾아보면, 근대 제물포 개항 이전부터 이미 대륙의 문물이 한반도에 전파되고 한반도의 문물이 해외로 나가는 중요한 공간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인천시 기념물 제8호 능허대지(凌虛臺址)는 1600여 년 전 삼국시대 부터 대외교류의 거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능허대는 연수구 청량산 끝자락의 서북쪽에서 뻗어 조그만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포구인데, 과거 중국 사행(使行)길에 오르는 사신들이 배를 탔던 곳으로‘한나루’라고 일컬었다. 『인천부읍지』(19C)에는, “능허대 아래에 있는 대진(大津)은 삼국정립 때 백제의 조천로(朝天路)이다. 고구려에 의해 길이 막히자 중국 가는 사신이 여기서 바다를 건너 중국 산동의 동래주(東萊州)에 닿았다 한다.”고 전하고 있다.
당시 한나루와 산둥반도를 잇는 등주항로는 중국으로 향하는 최단 거리로, 백제가 웅진(熊津)으로 천도하기 전인 475년(개로왕 21)까지 100여 년간 인천을 통해 중국과 교류한 바닷길이다.
당(唐)의 소정방(蘇定方)이 득물도(得勿島, 현재의 덕적도)를 경유하여 백제를 공격한 점, 용유도에 고려 사신이 머물렀다는 조천대(朝天臺)가 전해지고 있다는 점, 고려시대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객관인 경원정이 영종도에 건립된 점, 남경(南京)에 도읍을 한 명(明) 초기와 여진족이 발흥한 후기에 중국으로의 사행은 육로(陸路) 뿐 아니라 해로(海路)도 활발히 이용되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삼국시대 이래 조선시대까지 인천 연안을 통한 중국과의 해상교류는 지속되어졌을 것이 분명하다.
문학산의 사모지고개[三呼峴 : 이별을 아쉬워하여 따라온 가족들이 능허대쪽으로 멀어져 가는 사신을 크게 세 번 외쳐 부름], 용유도의 기암[妓巖 : 사신과의 이별을 아쉬워 하는 기녀의 이야기] 등 인천 곳곳에서 전해지는 중국 사행과 관련되는 전설들은 그 교류의 흔적이라고 하겠다.
1950년대까지 인천의 대표적인 유원지였던 능허대와 그 해변은 매립으로 개발되어 옛날의 수려했던 풍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현재는 1988년 능허대 둘레에 연못을 조성하면서 그 위에 세워둔 조그만 정자만이 예전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인천이 오늘날 국제공항과 항만을 갖추고 대외 교류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능허대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수행해 왔던 역사적 사실을 증거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며 “앞으로도 인천이 세계무대에서 문화교류와 경제교역의 핵심적인 열린 공간으로 발전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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